한화(000880)그룹이 미국 필라델피아주에 위치한 필리조선소에 대한 시설인증보안(FCL)을 미 당국에 신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FCL은 미 군함 건조와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획득해야 하는 필수 인증이다. 본래 상선 건조 중심으로 필리조선소를 운영하고 FCL 획득은 중장기 전략 계획으로 남겨뒀으나, 54조 원에 달하는 미 군함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속도전에 나서는 것으로 보인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국방산업보안국(DCSA)은 지난해 말부터 필리조선소에 대한 FCL 인증 작업을 벌이고 있다. 미 국방부 산하 기관인 DCSA는 기업이나 시설이 미 정부 기밀 정보를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를 평가하고 공식 보안 자격을 부여한다.
한화는 지난해 12월 필리조선소에 대한 인수 작업이 최종 마무리되자마자 FCL 신청에 나섰다. 현재 조선소의 노후화된 시설과 장비를 교체하는 작업과 함께 보안 인증을 받기 위한 설비 투자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보통 12~18개월가량의 기간이 소요되는데, 최대한 기간을 단축하겠다는 목표다.
필리조선소는 석유화학제품 운반선(PC선), 컨테이너선 등 미 연안 운송용 중소형 상선을 전문적으로 건조하던 시설이다. 관공선과 해군 수송함을 수리·개조한 적은 있지만, 전투함을 다뤄본 경험은 없다. FCL 획득은 필리조선소로서도 새로운 도전이다.
한화가 필리조선소의 보안시설 인증에 속도를 내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동맹국의 미 군함 건조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화가 지난해 6월 필리조선소 인수를 선언할 때만 해도 특수선보다는 상선 시장을 겨냥한 의도가 컸다. 미국은 1920년 제정된 존스법(Jones Act)에 따라 자국 연안을 오가는 선박은 미국 내 조선소에서만 건조돼야 한다. 한화는 미 조선업 산업이 기술과 생산력 면에서 떨어진다는 판단 아래 필리 조선소에 한국의 선박 기술을 접목해 시장을 장악한다는 계획이었다. 미국에선 한때 조선업을 영위했던 조선소가 400곳이 넘었지만, 현재 수주잔고를 보유하고 있는 조선소는 19개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미 조선업 부활을 위해 한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진출 범위가 특수선 분야로까지 확대됐다. 미 의회에선 외국 조선소의 미 군함 건조를 금지하는 현행 번스-톨리프슨법(Burns-Tollefson Act)을 개정해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에서도 미 군함 건조를 가능케 하는 법안까지 발의됐다. 이에 한화는 현지 조선소가 있는 이점을 활용해 군함 등 특수선 시장도 빠르게 진입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한화가 지난해 인수 협상이 무산됐던 호주 조선·방산업체 오스탈 지분 매수에 다시 나선 것도 이같은 배경 때문이다. 오스탈은 미 함정을 직접 건조하는 4대 핵심 공급업체 중 하나로, 앨러바마주 모빌과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이미 FCL 인증을 받은 조선소를 가지고 있다. 미국내 소형 수상함, 군수지원함 시장점유율이 40~60%(1위)에 달한다. 한화는 협상을 통한 오스탈 인수가 불가능해지자 3월 호주증권거래소 장외거래를 통해 지분 9.9%를 직접 매수했고 19.9%까지 비중을 늘릴 방침이다. 19.9%면 오스탈의 최대 주주 자리에 오른다. 필리조선소와 오스탈의 미 조선소 2곳 등 미 동·서·남부에 펼쳐진 현지 조선소를 통해 군함 건조와 MRO 사업 수주에 공격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한화오션(042660)은 지난해 두 건의 MRO를 수주하며 미 해군과 신뢰를 쌓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미 해군 전력 강화를 위한 함정 건조 및 MRO 시장은 2054년까지 매년 54조 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는 최근 공개한 ‘미국 해양 조선업 시장 및 정책 동향을 통해 본 우리 기업 진출 기회’ 보고서에서 미 해군의 신규 함정 건조 시장은 연간 44조 원, MRO 시장은 11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1월 미 의회예산국이 발간한 ‘해군 신규 선박 건조 계획’ 등을 분석한 것으로, 의회예산국은 미 해군이 2054년까지 연평균 300억 달러(약 42조 6200억 원)를 투입해 총 364척의 신규 함정을 건조할 것이라고 공개했다. 계획대로면 미 해군 함정 규모는 현 296척에서 381척까지 늘어난다.
MRO 시장 또한 매년 커지고 있다. 미 회계감사원에 따르면 2023년 미 해군은 함정 MRO 사업에 73억7900만 달러(약 10조4800억원)를 썼다. 2020년 60억9300만 달러에서 3년만에 10억 달러가량 늘었다. 업계 관계자는 "동맹국의 군함 건조가 가능해지더라도 미 정부는 해외보다 자국 내 건조 방식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며 "한화그룹이 현지 건조 조건을 바탕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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