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을 담은 기록물이 최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됐지만 사회 곳곳에서 4·3 사건에 대한 왜곡·폄하가 잇따르고 있다. 이에 처벌 규정이 없는 현행 4·3 특별법을 개정해 형사처벌 조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3일 교육계에 따르면 제주 소재 A 고등학교는 이달 11일 학교 홈페이지에 “최근 수업 중 교사 발언과 관련해 학생과 학부모·지역사회·교육 공동체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 깊이 사과드린다”고 공지했다.
학교 측의 사과는 지난달 A 고등학교의 교사 B 씨가 수업 중 4·3 사건에 대해 부적절하게 발언한 데 따른 것이다. A 씨는 통합사회 OT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자신의 말에 반응하지 않자 ‘제주도는 옛날부터 말을 하면 잡혀가서 그 유전자가 각인된 것 같다’ ‘4·3 유전자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교 측은 B 씨의 발언에 대해 “교사 면담과 교사 진술서를 통해 첫 수업의 분위기를 유연하게 만들기 위한 말이었음을 확인했지만,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는 방식에 있어 부적절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B 씨의 발언을 비롯해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 등지에서는 여전히 ‘4·3 사건은 폭동’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 조종한 것’ 등의 왜곡과 폄하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제주 4·3 평화재단은 지난해 3월부터 4·3 역사 왜곡 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있지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에 회부하거나 일일이 유튜브·온라인 포털 댓글을 신고하는 것에 그친다. 재단 관계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회부의 경우 사안마다 1년 가까이 걸려 사실상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는 제주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등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것과는 상반된다. 앞서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이달 11일(한국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제주4·3 기록물’과 ‘산림녹화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로 했다. 1997년 훈민정음·조선왕조실록을 시작으로 2001년 직지심체요절·승정원일기, 2011년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등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총 20개의 유산이 세계기록유산에 선정됐다.
제주 4·3 기록물의 자료는 7년 간 역사를 다루는 공공기관 문서·재판 기록·언론 자료 등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돼 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두 기록물은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회복, 그리고 지속 가능한 환경 재건의 경험이 전 세계가 함께 기억해야 할 가치 있는 기록으로 인정받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4·3 사건이 담고 있는 역사적 가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만큼 현행 4·3 특별법을 개정해 처벌 조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행법은 “누구든지 공공연하게 희생자나 유족을 비방할 목적으로 제주4·3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 및 제주4·3 사건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여 희생자, 유족 또는 유족회 등 제주4·3사건 관련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정작 처벌 조항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국가 폭력으로 발생한 또다른 사건인 5·18 민주화 운동의 경우 2020년 5·18 역사왜곡처벌법 제정으로 처벌 근거가 마련된 바 있다.
지난해 9월 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유족에 대한 보상 근거 마련과 허위사실 유포를 통한 역사적 사실의 부인·왜곡·날조 및 명예훼손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4·3 특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에 따라 해당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경우 4·3 사건에 대해 부인·비방·왜곡·날조 등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람은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처벌 조항 강화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경수 법학 박사가 2020년 발표한 ‘국제인권법에 비추어 본 제주4·3특별법의 과제’ 논문은 “법률과 판례에 따른 반인도적 범죄로 인정된 사건을 부인하는 표현은 제한받을 필요가 있다. 이는 표현의 자유 행사의 남용에 해당되기 때문”이라면서 “제주 4·3사건을 왜곡하는 행위는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 단순히 모욕감을 주거나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적인 정의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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