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정책의 강도를 한 층 낮춘 배경이 최근 미국 국채 시장의 불안 신호 때문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단기간에 미국 국채의 투매가 확대되면서 2022년 영국 국채 불안이 금융 시장 위기로 번질 뻔했던 사례가 재발될 수 있다는 우려에 관세 정책에서 후퇴했다는 설명이다.
9일(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상호관세를 유예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사람들이) 약간 겁을 먹었다”라고 답변했다. 그는 국채 시장의 반응 때문에 관세를 유예했냐는 질문에 “난 국채 시장을 보고 있었다. 국채 시장은 매우 까다롭다”면서 “내가 어젯밤에 보니까 사람들이 좀 불안해하더라”라고 말했다.
미국 국채 시장에서는 최근 투매가 발생하면서 금리가 폭등했다. 마켓워치에 따르면 미국 30년 물 국채는 지난 4일 4.422%에서 전날 4.777%로 35.5bp(1bp=0.01%포인트) 올랐다. 10년물 국채 수익률도 같은 기간 29.5bp 상승했다. 로이터통신은 10년물 국채의 주간 상승률은 현재까지 2001년 이후 가장 높고 30년 국채 금리의 최근 3일 상승치는 1982년 이후 가장 높다. 국채 금리는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며 금리 상승폭이 크다는 것은 매도세가 그만큼 강했다는 의미다.
스콧 베센트 재무 장관은 이날 “나는 이것이 시스템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며 “불편하긴 하지만 채권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상적인 레버리지 해소(차입 축소)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시장의 시각은 달랐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금까지 나온 많은 징후 가운데 가장 우려되는 금융위기의 징후”라며 “이는 단순한 시장 스트레스 증상이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원인”이라고 우려했다.
국채 가격이 하락하면 금융 시장에서 국채를 담보로 자금을 유통한 거래의 청산 압력이 커진다. 담보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이에 금융기관들이 담보를 보강하거나 빚을 상환할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내던져야 해 또 다시 국채 가격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올 수 있다. 2022년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가 사임한 배경에도 이같은 영국채 가격 폭락과 각종 펀드들의 청산 압력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트러스 총리는 글로벌 금융 위기를 초래할 뻔한 책임을 지고 취임 44일 만에 사임하며 역대 최단기 영국 총리가 됐다. 당시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연준) 관련해 비공개 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번에도 연준이 나설 때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도이체방크의 글로벌 외환전략책임자인 조지 사라벨로스는 “미 국채 시장 혼란이 계속되면 연준이 국채를 긴급매수해 시장을 안정시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는 2022년 당시 영국중앙은행이 사용했던 방식이다. 제퍼리스의 토마스 사이먼스는 “안정화 대책이 나오는 데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율 조정 발표가 나오자 월가에서는 곧장 국채 시장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세계 최대 채권운용기관인 핌코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모하메드 엘-에리언 알리안츠 고문은 관세 유예 발표 직후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관세 유예를 어떻게 설득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며 “우리는 답을 얻었다. 바로 국채 시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늘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으로) 최근 엄청난 국채 가격 변동이 시장의 기능장애 수준에 얼마나 가까는지에 대한 답을 얻었다”고 말했다.
관세율을 90일간 10%로 낮추기로 한 이후 이날 30년물은 4bp 가량 하락하며 투매가 멈췄지만 10년물은 여전히 매도세가 이어졌다. 시장에서는 관세 전쟁이 격화하면서 세계 무역 질서에 대한 변동 우려가 커지고 이 과정에서 미국 경제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가 낮아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앞으로도 과연 세계 각국이 미국 국채를 보유하려고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는 설명이다. BNP파리바 자산관리의 최고투자어드바이저인 그레이스 탐은 “시장은 이제 중국과 다른 국가들이 관세에 대한 보복 무기로서 보유한 미국 국채를 내던질(dump)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진행된 미국 재무부의 10년물 경매에서 해외 중앙은행 등 일반 투자자의 수요가 강했다는 점은 일시적으로 안도감을 줬다. 블룸버그통신은 이에 대해 “중국이 보유한 미국 국채를 무기화할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던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라며 “시장 참여자는 관세 협상의 일환으로 일본이 경매를 통해 채권을 매입할 가능성을 제기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관세 감면의 대가로 채권을 매입하는 것은 ‘마러라고 협정의 라이트 버전’과 같은 조치”라고 평가했다. 앞서 스티븐 미런 백악관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지난해 보고서를 통해 관세를 앞세워 상대국에 미국 100년물 등 자기채를 매입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이를 ‘마러라고 협정’이라고 이름 붙인 바 있다.
코헨 앤드 스티어스의 제프리 팔마 매크로리서치 책임자는 “장기적인 의문은 거의 확실히 남아있을 것”이라면서도 “오늘 관세 유예 발표와 국채 입찰 결과는 지난 며칠간 지속된 높은 변동성 장세 이후 반가운 안도감을 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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