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0월 2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5차 솔베이 회의 참석자들입니다. 맨 앞줄 정가운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보이죠. 그밖에 마리 퀴리,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에르빈 슈뢰딩거 등 한번쯤 이름을 들어본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이 총집합했던 역사적 이벤트였습니다. 그곳에서 물리학자들은 새로운 학문 양자역학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이들이라고 해도 오늘날처럼 이론이 정립되기 전 양자역학을 발견해나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양자중첩 같은 기묘한 현상이 더욱 난해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인간 사고의 틀을 깬 상대성이론으로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로 인정받은 아인슈타인, 양자역학 방정식을 만든 슈뢰딩거조차도 양자중첩을 납득하지 못했다고 했죠. 오늘날 양자역학의 기틀을 다진 이들의 논쟁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백가쟁명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약 100년이 흐른 지금 양자역학은 양자컴퓨터 발명으로 이어져 새로운 춘추전국시대를 열었습니다. 구글, IBM,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웹서비스(AWS) 같은 빅테크뿐 아니라 양자컴 대장주로 평가받는 아이온큐, 리게티 같은 신흥강자들이 나오더니 큐에라, 퀀티넘, 사이퀀텀 같은 경쟁 스타트업들까지 기술 혁신이나 대규모 투자 유치로 줄줄이 등판하고 있습니다.
큐에라는 지난달 구글과 소프트뱅크로부터 2억 3000만 달러(3400억 원)를 투자 유치했습니다. 사이퀀텀은 60억 달러(8조 8000억 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으며 7억 5000만 달러(1조 1000억 원) 이상을 모금 중이라고 로이터가 최근 보도했고요. 퀀티넘은 지난해 JP모건체이스 등으로부터 3억 달러(4400억 원)를 투자받았습니다.
훗날 양자컴퓨터가 현재의 PC처럼 보편화했을 때 누가 승자가 될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아직 제대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양자컴퓨터 기술들이 나란히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번 편에서는 앞으로 양자컴 춘추전국시대의 판도를 가늠하는 데 필요한 지형도, 즉 기술별 원리와 특징을 짚어보겠습니다.
◇ 주류 양자컴 공통분모는 ‘에너지 준위’
이 연재 시리즈명인 ‘퀀텀점프(양자도약)’는 비약적 발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는 양자중첩처럼 양자역학의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100여년 전에는 원자 내부 중심에 원자핵이 있고 그 주변을 전자들이 공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양계를 도는 행성들처럼 전자도 여러 공전 궤도가 있을 수 있겠죠. 태양계와 한가지 다른 점은 전자는 돌 수 있는 궤도가 몇 가지로 한정돼 있다는 겁니다. 비유하면 지구와 화성 궤도에서는 돌 수 있는데 그 사이 어중간한 공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죠.
궤도 간 이동할 때도 우리는 우주선을 타고 지구와 화성 사이를 지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전자는 중간이 없이 지구 궤도에서 화성 궤도로 한번에 점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같은 전자의 불연속적 움직임을 양자도약이라고 합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에너지 준위(레벨)’라는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전자는 에너지를 흡수하면 더 높은 궤도로 오르고 반대로 에너지를 방출하면 더 낮은 궤도로 떨어집니다. 이때 전자가 가질 수 있는 에너지는 몇 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가령 100, 250, 400…등 몇 가지 에너지만 가질 수 있어서 에너지 100의 전자에 더도말고 딱 150을 더 줘야만 에너지 250이 되고 그에 맞는 궤도로 오를 수 있습니다. 151처럼 어중간하게 더 많은 에너지를 줘받자 오히려 전자는 이를 흡수하지 못하며 궤도도 바뀌지 않습니다. 아예 400의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300을 주입해야만 전자가 그에 맞춰 궤도를 높입니다. 전자가 에너지를 방출해서 궤도를 낮출 때도 마찬가지고요.
설명이 길었지만 강조하고픈 건 에너지 준위라는 양자역학의 특징입니다. 한번 더 반복하면 전자나 원자 같은 작은 입자는 100, 250, 400… 같은 식으로 정해진 에너지 크기만 가질 수 있습니다. 레벨1=100, 레벨2=250, 레벨3=400과 같은 식으로 전자의 에너지 크기를 등급화해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에너지라고 안 부르고 에너지 레벨, 즉 에너지 준위라고 강조해서 부릅니다. 전자가 250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가 150을 방출하고 100으로 낮아졌다면 ‘에너지준위가 2에서 1로 낮아졌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 확장성이냐 안정성이냐…초전도 vs 이온트랩 vs 중성원자
에너지 준위로 초전도, 이온트랩, 중성원자 등 오늘날 주력 양자컴퓨터들 대부분이 큐비트를 구현합니다. 더 정확히는 에너지 준위의 양자중첩 상태로요. 에너지 준위가 전자나 원자처럼 작은 입자가 갖는 양자역학의 특징이라고 했죠. 에너지 준위도 ‘여러 상태’에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중첩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입자가 레벨1이나 레벨2의 특정 에너지 준위만 갖는 게 아니라 둘을 동시에 갖는 양자중첩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거죠. 두 에너지 준위를 0과 1에 대응시키면 바로 큐비트입니다.
초전도 양자컴퓨터는 말그대로 초전도체를 이용해 큐비트를 구현하는 기술입니다. 초전도체는 극저온에서 전기 저항이 0이 되는 물질인데 두 초전도체 사이에 얇은 이물질을 끼워넣으면 ‘조셉슨 접합’이라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설명을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조셉슨 접합으로 인해 초전도체 안에서 입자의 에너지 준위는 두 가지 레벨로만 한정되며 두 상태를 각각 0과 1에 대응시킬 수 있습니다. 당연히 둘의 중첩을 통한 큐비트로 계산을 수행하고요.
초전도 양자컴퓨터는 반도체와 유사한 공정을 활용하는 만큼 규모를 키워 큐비트 수를 늘리는 확장성이 비교적 높고 연산속도도 빠르다고 평가됩니다. 대신 큐비트의 양자중첩 상태 지속 시간이 비교적 짧고 영하 273℃에 가까운 극저온 환경을 구현할 대형 냉각장치와 전력 소비가 필요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교적 구현이 쉬운 방식인 만큼 현재 구글·IBM·MS·AWS 등 대부분의 빅테크와 디웨이브퀀텀·리게티 등이 채택한 기술입니다.
반면 이온트랩과 중성원자는 입자 하나하나를 더 정교하게 제어하는 기술입니다. 초전도와 비교하면 극저온 냉각장치가 필요 없고 더 안정적이라 큐비트 지속시간이 더 길다고 평가됩니다. 정교한 만큼 향후 칩 집적도를 더 높일 수 있을 것으로도 기대되고요. 두 방식은 공통적으로 레이저라는 강력한 빛, 다른 표현으로는 전자기장으로 입자를 가두거나 고정시키는 방식이라고 보통 설명됩니다.
전기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하잖아요. 이때 양극은 산봉우리, 음극은 산골짜기라서 전기 입자가 높은 양극에서 낮은 음극으로 굴러떨어진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전자기장(場)은 양극과 음극이 만드는 가상의 지형지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자기장을 잘 조절해 움푹 팬 분지 지형(안장점)을 만들고 그 안에 입자를 얌전하게 가둘 수도 있겠죠. 레이저로 입자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제어하는 원리입니다. 큐비트 구현은 역시 입자의 에너지 준위으로 이뤄집니다.
그중 이온트랩은 전기를 띠는 원자인 이온을 레이저로 제어하는 기술입니다. 이온을 전기적 덫(트랩)에 가둔다는 개념이죠. 위에서 말한 장점에 더해 초전도보다 오류가 적어 계산 정확도가 비교적 높은 대신 계산속도는 더 느리고 입자를 ‘한땀한땀’ 제어해야 하기 때문에 확장성도 더 불리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이온큐와 퀀티넘이 대표주자입니다.
중성원자는 비슷하지만 전기를 띠지 않는 원자의 에너지 준위로 큐비트를 구현합니다. 제어하는 방법은 역시 ‘광학 격자’, ‘광학 집게’라고 부르는 전자기장이죠. 전기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자기(磁氣) 등에 반응해 제어됩니다. 대표주자로는 큐에라와 더불어 20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알랭 아스페 연구팀이 만든 파스칼이 있습니다. 중성원자는 이온트랩과 달리 큐비트를 늘리는 확장성에서 더 유리하다는 게 파스칼의 설명입니다. 다만 계산속도가 느리고 기술 난이도가 높다는 게 단점으로 꼽힙니다.
◇ 더 정교하게…전자·광자 큐비트 도전도
큐비트 구현에 활용되는 입자 상태가 에너지 준위만 있는 건 아닙니다. 전편들에서 몇번 언급했던 ‘스핀’이 대표적이죠. 지구가 자전하면 내부에 전기를 띤 금속핵도 회전하면서 자기장이 발생하는데요. 마찬가지로 전자나 원자도 자전(스핀·spin)한다고 생각해야만 설명 가능한 현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자나 원자가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양자중첩 상태의 구름 형태에 가깝다고 했으니 자전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관련 현상은 존재하기에 그냥 우리말 번역 없이 스핀이라는 상태를 가진다고 표현합니다. 자전은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이 가능하죠. 스핀도 두 방향이 있고 이를 0과 1에 대응하면 큐비트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스핀 큐비트 역시 입자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제어해야 해서 기술 난이도가 높은 대신 잘 구현만 한다면 집적도와 정확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대표적 연구로 국내 기초과학연구원(IBS)이 2023년 10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한 전자 스핀 큐비트가 있습니다. 연구진은 일본·스페인·미국과의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3개의 전자 스핀으로 복수의 큐비트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큐비트를 정밀 제어하고 수백 큐비트까지 확장할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었습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지난해 광자를 활용해 상온 작동이 가능한 또다른 큐비트 구현 방식을 선보였습니다. 광자, 즉 빛이 두 갈래길에서 한쪽으로 가면 0, 다른 쪽으로 가면 1에 대응시킬 수 있으며 역시 두 상태가 중첩된다는 것이죠. 이처럼 큐비트 구현 방식은 학계에서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아직 섣부르게 우열을 가리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초전도가 계속 주도권을 쥘지, 다른 기술이 떠오를지 앞으로 무엇이 주류가 될지도 양자컴퓨터 산업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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