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가 철강은 미국과 관세 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쥐고 있는 비밀무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일괄적으로 관세를 물렸다가 자국 기업들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품목들이 철강 제품군(群)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한국에만 예외적으로 관세를 물리지 않는 특혜를 얻어내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도 깔려 있다. 실제 박종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가 최근 미국을 방문해 철강·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25% 관세 면제를 요청했지만 미국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정부 내부의 분위기다. 이 때문에 범용 철강 제품에는 관세를 받아들이되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는 고부가 제품에 대해서는 ‘핀셋’ 관세 면제를 요구해 시장 영향력을 키운다는 게 정부의 전략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미국이 전략적으로 품목 제외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최근 미국 상무부는 자국 내 철강 수요 기업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데 자국 내에서 일부 한국산 철강 제품에 대해 관세 부과를 면제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생산 난이도가 높은 고부가 제품들은 미국 업체들이 원하는 규격과 품질을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가령 콜라 음료 캔을 만드는 석도 강판은 미국 내 자급률이 3%에 불과해 한국과 같은 특정 나라에서 석도 강판 대부분을 들여와야만 공장을 가동할 수 있다. 또 유정용 강관도 미국이 석유·천연가스 시추 활동을 늘리려면 한국산 강관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동차용 특수강판도 전기차 확대와 연비 규제 강화에 발맞춰 가볍고 튼튼한 한국산 고성능 강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산 고부가가치 철강 품목에 25% 고율 관세가 부과되면 미국 국내 기업들은 원가 상승과 공급 불안정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된다. 이 경우 음료 업계는 캔 원료 공급이 차질을 빚어 생산 라인마저 멈추게 되고 제조원가 상승이 불가피해 음료 산업 전반에 물류·유통비 증가까지 번질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미국 정유·가스업계 역시 시추 비용이 대폭 늘어나 에너지 생산성이 떨어지게 된다. 고압·고온 환경을 견뎌야 하는 강관의 특성상 내구성이 우수해야 하며 이 분야에서 한국 업체들은 오랜 경험과 글로벌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정유 업계의 한 관계자는 21일 “관세가 부과되면 미국의 시추 비용이 급등해 생산성이 떨어질 것”이라며 “미국 내 에너지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도 한국산 유정용 강관의 원활한 수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특수철강 제품들은 우리가 관세 예외를 주장해볼 만하다”고 강조했다.
정부 관료들의 협상 움직임도 가속화되고 있다. 안 장관은 이날 조셉 윤 주한 미국대사 대리와 만나 한미 간 교역·투자 및 에너지 분야 협력 강화 방안 등을 논의했다. 양측은 이 자리에서 신정부 출범 이후에도 협력을 강화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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