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에 TV쇼에 출연해 세탁기 문 안으로 칩샷을 넣던 수줍은 소년이 26년 후 다시 웨지를 들고 방송 카메라 앞에 섰다. 똑같이 세탁기를 향해 샷을 날렸는데 이번엔 영롱한 그린재킷 차림이었다.
로리 매킬로이(36·북아일랜드)는 2일(한국 시간) 미국 뉴욕의 NBC방송 스튜디오를 찾아 심야 토크쇼 투나잇쇼에 출연했다. 오랜 진행자 지미 펠런의 환영에 매킬로이는 “이 그린재킷을 입기 전까진 출연 안 한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오게 돼 기쁘다. 다시 나오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고 말했다.
매킬로이는 지난달 제89회 마스터스에서 연장 끝에 우승해 골프 역사에 역대 여섯 번째인 커리어 그랜드슬래머(4대 메이저 대회 석권)가 됐다. 마스터스 뒤 2인 1조 대회인 취리히 클래식을 ‘절친’ 셰인 라우리와 함께 치렀고 다음 출전할 대회는 8일부터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열릴 트루이스트 챔피언십이다.
마스터스 우승 부상인 그린재킷 차림에 블루 계열 넥타이를 하고 출연한 매킬로이는 “마지막 날 목표는 4언더파 치기였는데 첫 홀 더블 보기에도 어쨌든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진 건 아니니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2타 차 단독 선두로 출발한 매킬로이는 최종일에 1오버파를 쳐 연장에 갔지만 연장 첫 홀 버디로 생애 첫 마스터스 우승과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라는 대업을 이뤘다. 2011년 마스터스 최종 라운드를 4타 차 선두로 출발하고도 80타를 치고 미끄러졌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때보다 훨씬 성숙해졌음을 스스로 느꼈다고도 했다.
축하 인사와 메시지의 행복한 홍수 속에서 특히 놀라웠던 건 영국 팝의 전설 엘튼 존의 축하다. 그가 개인적으로 축하를 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존의 측근이 음성 메시지로 전해왔다고 한다. 존은 개인 휴대폰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킬로이는 “사실 나는 존이 골프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영원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로부터도 물론 축하를 받았다. “간단하게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클럽에 들어온 걸 환영해.’” 커리어 그랜드슬램 클럽 회원 여섯 명 중 한 명이 우즈다. 매킬로이에 앞서 2000년에 4대 메이저 석권에 성공했다.
매킬로이는 신동이었다. 집에서 세탁기를 타깃 삼아 칩샷 연습을 했었고 아일랜드 방송의 한 토크쇼에 나가 똑같이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투나잇쇼 진행자 펠런은 방송 말미에 ‘세탁기 샷’ 대결을 제안했다. 누가 먼저 공 3개를 넣느냐.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며 매킬로이는 “명색이 마스터스 챔피언인데 당신한테 질 순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마스터스 챔프답게 네 차례 칩샷만으로 세 번을 넣었다. 이 사이 펠런도 하나를 넣으며 ‘선전’했다.
매킬로이는 다음날 아침 투데이쇼에도 출연했고 뉴욕타임스 인터뷰도 했다. 이 사이 매킬로이의 투자회사인 심포니벤처스는 사모펀드 TPG와 손잡고 TPG스포츠를 출범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TPG가 굴리는 자산만 2000억 달러(약 280조 원)에 이른다.
매킬로이는 뉴욕타임스에 “스포츠는 엄청난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스포츠계에 어마어마한 투자가 몰리고 있으며 이를 통해 스포츠는 더 프로페셔널해질 것이고 비로소 21세기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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