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23일 고려아연(010130) 임시 주주총회에서 집중투표제를 적용한 이사 선임에 제동을 걸었다. 이로써 의결권 50%에 육박하는 영풍(000670)·MBK파트너스가 이사회 과반 차지를 통한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에 한층 가까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김상훈 수석부장판사)는 21일 영풍·MBK가 고려아연을 상대로 제기한 임시 주총 의안 상정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임시 주총에서 집중투표제 도입을 결정하더라도 차후 정기 주주총회부터 적용하게 된 것이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유미개발이 집중투표 청구를 했던 지난해 12월 10일 고려아연의 정관은 명시적으로 집중투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며 “결국 이 사건 집중투표 청구는 상법의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적법한 청구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상법 제382조의2 제1항 규정에 따르면 소수주주가 집중투표를 청구하는 ‘시점’에 이미 정관으로 허용돼 있어야 하는데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가족회사 유미개발은 정관 변경과 함께 집중투표로 이사를 선임할 것을 청구함으로써 이를 위반했다는 의미다.
임시 주총 주주명부 기준 영풍·MBK의 지분율은 40.97%, 의결권 기준으로는 46.7%다. 노르웨이연기금 등 해외 기관투자가 지분과 주총 출석률 등을 고려하면 50% 달성은 무난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최 회장 측은 우호지분을 모두 더해도 33% 수준에 그친다.
집중투표제는 주총에서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 주주에게 의결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최 회장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꺼낸 ‘히든 카드’다. 최 회장 측은 특별관계인 53명을 보유하고 있어 만약 이번 임시 주총에서 적용됐다면 MBK 측이 이사회 과반을 차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 바 있다.
일단 집중투표제 도입은 임시 주총 안건으로 올라 있어 표결이 진행될 예정이다. 국민연금과 글래스루이스 등의 의결권 자문사가 도입을 찬성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업계에서는 한화 등의 대기업들이 집중투표제를 시행하지 않고 있는 만큼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한국ESG연구소와 ISS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사 수를 19명으로 제한하는 건의 경우 3분의 2의 동의가 필요한 특별결의 사안인 만큼 부결이 확실시된다. 이 경우 현재 고려아연 이사회는 최 회장 측 11명과 영풍·MBK 1명의 구도인데 MBK 이사진이 모두 선임되면 11명 대 15명으로 역전된다. MBK는 14명, 최 회장 측은 7명을 각각 추천했다. 이사 선임은 개개인에 대해 출석 주주의 과반이 찬성하면 된다. 이대로면 지난해 9월 시작된 영풍·MBK와 최 회장 간 경영권 분쟁이 4개월 만에 일단락될 수 있다.
영풍·MBK는 입장문을 통해 “이번 법원의 결정으로 고려아연 거버넌스 개혁에 신호탄이 쏘아졌으며 이사회 개편과 집행임원제도 도입 등 실질적인 지배구조 개선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의장권을 갖고 있는 최 회장 측에서 집중투표제 도입이 결정될 경우 사외이사 선임 안건을 상정하지 않는 ‘꼼수’를 쓸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이번 임시 주총에서 이사 선임까지 확실히 표결을 마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려아연은 ‘캐스팅보터’ 국민연금(4.51%)이 집중투표제에 손을 들어줘 승기를 잡은 듯했지만 법원의 판결에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고려아연은 이날 입장문에서 “법원의 이번 판단은 이번 임시 주총에서 집중투표제를 도입하는 안건과는 무관한 사항인 만큼 소수주주 보호 및 권익 증대라는 애초 취지에 맞춰 집중투표제 도입 안건을 적극 추진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법원의 결정이 나온 직후 고려아연 주가는 전 거래일보다 8.55% 급락한 75만 9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장중 내내 약세를 보였던 영풍 주가는 급상승세로 전환하며 9.57% 오른 41만 8000원에 장을 마감했다. 법원의 집중투표제 제동으로 경영권 분쟁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예상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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