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한한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불가리아 출신이다. 냉전 시대 옛 소련 공산당의 영향을 받았던 불가리아는 유럽연합(EU)의 27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가난한 나라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명의로 된 은행 계좌를 개설한 것은 영국으로 유학을 간 34세 때라고 한다. 공산권 국가에서 살았던 터라 금융거래를 해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지닌 그가 IMF라는 국제금융기구의 수장이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약소국 출신 여성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경을 견뎌냈을지 짐작이 간다.
이 같은 배경 덕분인지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도 큰 관심을 보여왔다. 한국 정부와 IMF가 공동 주최한 국제 콘퍼런스 참석을 위해 이달 14~15일 방한했을 때도 서울에서 열린 세계여성이사협회 포럼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고 이화여대를 방문해 김은미 이화여대 총장 및 학생들과 대담을 하기도 했다. 방한 기간 그가 한 발언 중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여성의 경제적 역량 강화를 꼽은 것이다.
그는 “한국이 근로시간의 성별 격차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수준으로 축소할 경우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8% 상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구 감소 추세에서 가장 단기적이고도 손쉽게 경제성장률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인 셈이다. 고위직 여성 증가가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소개했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IMF가 유럽 기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고위직 여성의 비중이 큰 금융회사일수록 부실대출 비율은 낮고 재무 안정성이 더 높은 경향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한국은 남녀 격차가 선진국 가운데 가장 큰 나라 중 하나다. 일하는 여성의 수는 남성보다 18% 더 적고 임금은 남성에 비해 31% 적게 받는다. 이 같은 한국의 경제활동 참가율 남녀 격차는 OECD 38개국 중 일곱 번째로 높은 수치다. 유리천장도 여전하다. 국내 10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 중 여성은 2.4%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창업자와 혈연관계에 있는 여성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창업자와 혈연관계가 없는 여성 CEO의 비중은 0.5%에 그친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여성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일·가정 양립을 위한 지원, 유연한 노동시장, 사회적 관습 개선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핀란드·스웨덴과 같은 ‘탄력근무제’와 남성의 육아휴직 확대도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남성들이 육아휴직을 쓰는 것은 남성들에게도 유익하며 이를 통해 육아휴직을 쓰는 여성들과 연공서열이 비슷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주목할 부분은 게오르기에바 총재가 제시한 방안들이 잘 이행되는 노르웨이나 스웨덴과 같은 선진국이 출산율도 높다는 점이다. 유럽의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소(CEPR)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에는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날수록 출산율은 낮아지는 역의 상관관계가 나타났으나 2000년 이후 선진국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이 증가하면서도 출산율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 선진국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저렴하고 유연한 보육 서비스, 양육에 관한 남편의 적극적인 역할, 친가족적인 사회적 규범, 유연한 노동시장 등이다.
결국 여성의 경제활동을 늘리는 것이 국가 소득은 물론이고 출산율을 높이는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취재를 위해 기업인들을 만나 보면 여성 직원들이 남성보다 우수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여성 채용을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채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출산 및 육아로 휴직 등 업무 공백이 생길까 우려된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마음 놓고 여성 인재를 채용할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 올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사상 처음으로 1%대로 떨어졌다. 더 많은 여성을 일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추락한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려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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