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낸 국내 상장사의 절반이 공급망 전반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공시조차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2026년부터 공급망·소비처에서 발생한 온실가스를 밝히도록 하는 등 관련 규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국내 기업들의 준비가 크게 미흡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9일 서울경제신문이 올해 한국거래소에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공시한 코스피·코스닥 상장사 135곳(금융사 제외)을 전수 조사한 결과 이 중 66곳(48.9%)은 스코프3 온실가스 배출량을 집계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내는 회사들은 국내 상장사의 5% 수준으로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대응 역량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런 회사들도 2개사 중 1개사꼴로 스코프3 배출량을 밝히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만큼 스코프3 공시 관련 준비 및 대응이 거의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스코프3와 관련한 배출 항목을 모두 공시한 기업은 11%(15곳)에 불과했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낸 상장사 중
48.9%가 스코프3 아예 공시 못해
배출항목 모두 공시한 곳 11% 뿐
48.9%가 스코프3 아예 공시 못해
배출항목 모두 공시한 곳 11% 뿐
스코프3는 기업과 관련된 공급망이나 제품 소비처에서 발생한 온실가스 배출량을 말한다. 스코프1은 기업 소유 사업장 등에서 직접 발생한 온실가스, 스코프2는 기업이 에너지·전력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온실가스인데 스코프3는 측정 자체가 어렵다. 금융 당국은 연말까지 스코프1~3 내용 등이 담긴 ESG 기준안을 내놓을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EU 등 서구권이 온실가스 공시 제도를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각종 통상 정책과 엮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한다. 이는 제조업 중심 국가이면서도 ESG 경영 역량이 비교적 부족한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박재흠 EY한영 ESG임팩트허브 총괄리더(전무)는 “전 세계적으로 밸류체인 전반의 탈탄소화로 기후변화에 공조·대응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며 “수출 위주의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 기업들에는 매우 중대한 경영 환경 변화를 의미한다”고 짚었다. 한 회계법인 부대표는 “해외 온실가스 배출 공시 규제가 공급망 등 통상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스코프3 공개한 기업들 중에서도
10곳 중 8곳은 ‘일부 항목 누락’
데이터 및 관련 방법론 미비한 탓
10곳 중 8곳은 ‘일부 항목 누락’
데이터 및 관련 방법론 미비한 탓
대기업 A사는 온실가스 스코프3 배출량을 책정하기 위해 구매처에 탄소 배출량 관련 데이터를 요청했다. 국제 탄소 배출 공시 지침으로 통용되는 ‘GHG 프로토콜’에서는 각 기업들의 스코프3 데이터에 구매처로부터 물품을 사올 때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포함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래처에 관련 자료가 없어 A사는 스코프3 배출량을 온전히 공개할 수 없었다.
A사 사례는 온실가스 스코프3 관련 데이터를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을 잘 보여준다. 업계에서는 “협력사에 관련 데이터가 없는 경우가 많은 데다 제품이 판매되는 경로도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하다”며 “스코프3 배출량을 100%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스코프3 공시 규제를 강화하면서 제조업 중심의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서구권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정보 공개 요구로 통상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마저 커지고 있다.
실제 스코프3 공시 현황은 기업들이 사실상 무방비 상태임을 드러낸다. 한국거래소에 올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제출한 135곳 중 절반 가까운 66곳(48.9%)이 아예 스코프3를 공시하지도 못했다. 나머지 69곳(51.1%) 중에서도 GHG 프로토콜에 따라 자사의 사업 범위에 해당하는 스코프3 온실가스 배출 항목을 형식적으로 모두 공시한 곳은 삼성전자, 통신 3사 등 15곳(11.1%)에 불과했다.
GHG 프로토콜은 스코프3 공시 항목을 총 15개로 나누고 이 중 각 회사의 영업 분야와 관련되는 항목을 전부 공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스코프3를 공개한 기업 10곳 중 8곳이 자료 미비 등으로 GHG 프로토콜에서 요구하는 항목을 모두 공시하지 못한 것이다.
국내 기업들은 미국과 EU 등에서 마련하는 ESG 공시 기준에 대응해 공급망·소비처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공시 데이터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국제회계기준(IFRS)재단 산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ESG 공시 기준을 제정한 게 대표적이다. ISSB에 따르면 스코프1~2는 2025년, 스코프3는 2026년부터 의무 공시 대상에 포함된다. 10월에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기후 변화 관련 공시 기준을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 금융위원회도 ISSB 기준을 토대로 올해 중 ESG 기준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스코프1~3 전반에서 대응이 시급하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점이다. 해외 사업장에 대한 데이터가 미비한 탓이다. ISSB에서 ‘연결 실체’를 기준으로 기후 관련 정보를 공시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환경정보공개제도를 통해 온실가스 데이터를 ‘국내 사업장’ 중심으로 관리하고 있다. 한 기업의 ESG 담당자는 “외국 중 사업장별 온실가스 데이터를 관리하지 않는 곳이 많아 해외 법인 배출량 확인에 어려움이 크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환경부에서도 올해 말까지 환경정보공개제도 개편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美·유럽 통상무기화…데이터 구축·시행 유예 '투트랙' 대응해야
서구권이 ESG 정보 공시를 ‘통상 무기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제조업 수출이 중심이라 서구권의 ESG 규제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실제 유럽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공급망실사법 등 ESG와 통상 규제를 엮는 정책을 대거 발표하면서 재계는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인 우리나라로서는 대처가 더 까다롭다. 온실가스 공시 기준 도입에 소홀할 경우 ESG에 민감한 해외 자본이 국내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한 회계법인 임원은 “ISSB는 기본적으로 자본 이동의 문제”라며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서구권의 ESG 공시 지침을 그대로 따라가자니 현실적인 제약이 많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선경 한국ESG연구소 센터장은 “선진국들은 교토의정서 시절부터 ESG 공시 관련 준비를 해왔다”며 “반면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준비 기간이 상당히 짧은데 꼭 ‘ISSB가 이렇게 했다’고 그대로 따라가야 할지 되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온실가스 관련 데이터 역량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ESG 공시를 유예 시행하는 쪽으로 외교·통상 역량을 집중해 국내 기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 총괄리더는 “공급망 내 탄소 집약도를 명확히 측정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환경성평가목록 데이터베이스(LCI DB) 고도화 등에 적극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 상황에서는 스코프3 공시를 채찍질하기보다 충분한 유예 기간을 주면서 스코프1~2 공시부터 확산되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세종 관가의 한 관계자는 “통상 당국에서 온실가스 정보 공개와 관련해 EU 등과 꾸준히 커뮤니케이션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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