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벤처파트너스(298870)(옛 KTB네트워크)를 업계 1위 벤처캐피털(VC)로 성장시켜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겁니다. 5년 내 운용 자산을 두 배로 키우고 국내를 넘어 아시아에서도 명성을 인정받는 VC로 발돋움할 것입니다.”
한국 벤처 투자 업계에서 살아 있는 전설의 심사역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김창규 우리벤처파트너스 대표는 서울경제신문과 처음 만나 인터뷰를 하듯 이같이 포부를 밝혔다. 그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소공동의 우리금융지주(316140) 본사 빌딩. 한 달 전만 해도 다올금융그룹의 일원이던 김 대표는 다올인베스트먼트가 우리금융지주에 매각되면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모기업의 어려움 때문에 새 주인을 찾게 된 김 대표와 다올인베스트먼트 임직원을 품으면서 벤처 투자에 대한 전문성도 인정해줬다.
우리벤처파트너스는 지난달 23일 우리금융이 인수를 완료하며 열다섯 번째 자회사로 편입됐는데 임 회장은 다올인베스트먼트의 전신인 KTB네트워크 시절부터 30년 가까이 분골쇄신한 그의 성실함과 탁월한 투자 감각을 인정해 우리벤처파트너스의 수장으로 재선임했다.
우리금융지주는 그간 금융회사를 새로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하면 대부분 대표를 교체했지만 김 대표가 재선임되자 벤처 심사역으로서 전문성과 한 우물을 판 그의 집념이 인정받은 결과라는 평가가 나왔다.
김 대표는 우리벤처파트너스라는 새 사명은 전체 임직원들, 특히 MZ세대 직원들의 의견을 존중해 결정했다고 했다.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파트너가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우리벤처투자’ ‘우리벤처스’ 등 많은 의견이 나왔지만 앞으로 오랫동안 회사에 남아 일할 젊은 직원들의 뜻을 반영해 회사명을 결정했다”면서 “요즘 젊은 직원들이 줄임말을 좋아하니 ‘우벤파’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우리나라 1호 VC인 KTB네트워크의 명성과 신뢰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우리벤처파트너스는 1981년 과학기술처가 설립한 공기업이자 1세대 VC인 한국기술개발(KTB)이 전신이다. 1999년 민영화와 함께 투자를 넘어 증권사로 업무를 확대·재편했고 사명도 KTB투자증권으로 바꿨다. 2008년에는 KTB투자증권이 벤처 투자 부문을 분할하면서 KTB네트워크로 재탄생했다. 또 지난해 모회사였던 KTB투자증권이 사명을 다올투자증권으로 바꾸면서 다올인베스트먼트가 됐다. 우리벤처파트너스까지 포함하면 1981년 설립 이후 네 번이나 간판을 바꿔 단 셈이다.
김 대표는 “인수합병(M&A) 과정에서 저를 포함해 불안해 하는 직원들이 많았다”면서 “이제 안정을 되찾았고, 변화를 발판 삼아 옛 KTB네트워크 선후배들과 우리금융 동료들, 주주들에게 실망스럽지 않은 VC로 재도약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과거 우리는 독보적인 업계 1위였는데 주춤하는 사이 한국투자파트너스 등 경쟁사들이 앞서 나간 것은 사실”이라며 “좋은 대주주를 만난 만큼 회사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고 본다”고 자신했다.
그는 업계 1위 도약을 위한 구체적 목표로 운용 자산 3조 원대 돌파와 글로벌 벤처 투자 시장 진출 확대를 제시했다. 우리벤처파트너스는 1조 4600억 원의 운용 자산을 확보하고 있다. 운용 자산만 놓고 보면 한국투자파트너스와 소프트뱅크벤처스, KB인베스트먼트, IMM인베스트먼트 등에 이어 VC 업계 5위다. 1위인 한국투자파트너스의 운용 자산(3조 2000억 원)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우리벤처파트너스는 조만간 최대 약정액 4000억 원의 신규 스케일업 펀드 결성을 앞두고 있어 완료되면 운용 자산은 1조 6000억 원 수준으로 늘어난다.
특히 김 대표는 동남아시아와 미국 등 글로벌 벤처 투자 확대에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그는 “우리금융그룹 산하 VC가 된 지 한 달이 채 안 됐지만 벌써 해외 투자가들이 우리벤처파트너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면서 “조만간 미국 출장을 갈 예정인데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해외 대형 VC들과 미팅 약속을 수월하게 잡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우리벤처파트너스는 벤처 투자 업계에서 가장 먼저 글로벌 진출을 시도했던 VC로 꼽힌다. 중국 상하이와 싱가포르에 각각 해외 법인을 두고 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에도 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해외 유수의 VC가 조성한 벤처 펀드에 출자자로 나서며 탄탄한 투자 네트워크도 확보하고 있다. 전체 해외 벤처 펀드 출자 규모는 700만 달러(약 93억 원) 수준이며 최근에는 싱가포르 블록체인파운더스펀드에 50만 달러(약 7억 원), 인도네시아 AC벤처스에 100만 달러(약 13억 원)를 출자했다.
앞으로 해외 스타트업에 펀드 자금의 100%를 투자하는 글로벌 전략 펀드를 조성해 본격적인 해외 영토 확장에 나서겠다는 계획도 선보였다. 김 대표는 “해외 현지에서 대형 벤처 펀드를 조성해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어야 글로벌 톱 VC들과도 협력해 공동 투자를 진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내 VC들이 해외 벤처 투자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해외 스타트업에만 100% 투자할 수 있는 대형 펀드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며 “국내 출자 기관의 지원만으로는 역부족이어서 우리금융과 함께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펀드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벤처 투자 업계에 입문 후 30년 동안 현장에서 기복 없는 실력으로 승승장구했다. 그가 발굴해 각 분야 최고의 자리에 오른 스타트업들은 한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다. 하나마이크론과 엘오티베큠 등에 투자하며 코스닥 상장까지 성공시킨 김 대표는 최근에는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비바리퍼블리카(토스)·몰로코·알비더블유 등에 초기부터 투자해 대박 행진을 벌였다. 그는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이사회 의장과는 지금도 종종 만나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데 젊은 스타트업 대표들과도 연배를 떠나 꾸준히 교류하며 든든한 맏형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배민과 토스 투자는 회사 성장의 중요 모멘텀이 되기도 했다. 원활한 투자금 회수에 긍정적 영향을 주면서 실적 향상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KTB네트워크 시절인 2017년 83억 원이던 영업이익은 2021년 840억 원으로 10배 이상 치솟았는데 배민과 토스가 효자 노릇을 했다. KTB네트워크가 2021년 말 코스닥 상장을 추진할 당시 증시 입성의 원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김 대표의 투자 여정은 진행형이다. 토스만 해도 회수할 투자금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또 최근 단기간에 큰 수익을 안겨준 자율주행 모빌리티 스타트업 포티투닷도 김 대표가 탁월한 투자 감각을 발휘한 사례다. 포티투닷은 지난해 8월 현대차그룹이 인수하면서 우리벤처파트너스가 ‘잭팟’을 터뜨렸다. 2019년과 2020년에 걸쳐 투자한 90억 원이 2년 만에 250억 원으로 불어나 돌아왔다.
김 대표는 “포티투닷의 송창현 대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무조건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 “당시에도 현대차가 주주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자율주행 분야에서 두 회사가 협업하면 큰 성과를 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미래 유망 투자처를 묻자 블록체인과 웹3.0 등을 제시했다. 김 대표는 “젊은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블록체인·웹3.0 등의 분야가 앞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며 “시중 금리가 떨어지면 블록체인을 활용한 탈중앙화 인프라 기술 등으로 자금이 몰리고 본격적인 성장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30년간 벤처 투자 업계에 몸 담으며 1997년 말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지만 “지금은 콕 찍어 투자를 얘기하기가 망설여진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신중한 투자를 주문했다. 김 대표는 “과거 50억 원을 한 번에 투자했다면 이제는 기업 성장 주기별로 10억~20억 원씩 쪼개서 투자하는 것이 낫다” 면서 “투자 업계 상황은 물론 거시 경제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신중하고 이성적인 투자가 중요한 시기”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