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이 2일 일본을 향해 “미래를 보자”며 재차 관계 개선을 위한 메시지를 던졌다. 이달 1일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협력 파트너라고 평가하고 이튿날 다시 전향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복잡한 정서를 감안할 때 윤석열 대통령은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고 이번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평가된다. 이로써 전방위 협력으로 발전할지 여부를 놓고 한일 관계는 분수령을 맞게 됐다. 이제는 일본 정부에 공이 넘어갔다.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문제 등 현안에 대해 얼마나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할지에 한일정상회담 등의 성사 여부가 달렸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이날 한일 관계에 대해 “양국 국민은 과거보다 미래를 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일 관계와 관련해) 어떻게든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향해 가자는 세력과 반일감정을 이용해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이 있다”며 “어느 쪽이 국가의 이익과 미래 세대를 위해 고민하는 세력인지 국민들이 잘 판단하실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은 전날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글로벌 협력 파트너가 됐다”고 강조한 지 하루 만에 다시 양국 간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피력했다.
연이틀 정상회담의 카운터파트인 대통령실이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윤 대통령의 방일이 임박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복수의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한일정상회담과 관련해 “현재 아무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특히 4월로 예정된 방미 전에 윤 대통령이 일본을 찾아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날 것이라는 관측에 대해 대통령실은 “예정에 없는 사안”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정부와 외교가에서는 한일정상회담 성사 여부가 일본에 달렸다는 주장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 데서 나아가 강제징용과 위안부 같은 현안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지면서 일본에 선명한 메시지를 낸 만큼 일본도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이 리스크를 감수하며 손을 내밀었으니 일본도 그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우리 측이 주장하는 사죄 담화 계승, 일본 기업의 배상 참여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도 국내 사정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면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일 안보 협력을 본격적으로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은 현재 중국을 겨냥한 미국·일본·인도·호주의 안보협력체인 쿼드(Quad)에서 유일하게 동아시아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 하지만 한미일 안보 협력이 확장되면 쿼드+ 형태로 한국의 참여가 불가피하다. 또 경제협력체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협상에서도 산업 경쟁국인 한국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나아가 미국이 주도하는 주요 7개국(G7) 회원국에 한국이 포함돼 G8이나 G9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본에는 강제징용 협상이 단순히 과거사 문제만이 아닌 셈이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의 4월 방미 전에 한일 회담을 꺼린다는 해석도 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지금 G8·G9이 되고 싶어한다”며 “하지만 이 문제는 일본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일본에 공을 넘긴 우리 정부도 저자세 외교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어서 한일정상회담 성사 여부는 더욱 불투명해지고 있다.
한일 관계의 진전이 더딜 경우 조 바이든 미국 정부가 직접 관여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한일 관계는 양자 문제를 넘어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연결 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한·중국 등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미국은 한미일 3각 협력을 다져왔다. 실제로 미국은 공개적으로 관계 복원을 요구하며 한일 양국을 압박하고 있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1일(현지 시간) 언론 브리핑에서 “(한미일) 3국 협력은 우리가 많은 노력을 한 부분”이라며 “21세기에 3국이 직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박진 외교부 장관 등 관계 당국자들은 대일 외교 개선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만 강제징용 문제 등의 현안은 장관급 이상의 결단이 필요한 정무적 이슈인 만큼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양자 간 통화나 셔틀외교 등을 통해 정상급 교감으로 풀어야 출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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