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독일 사민당이 노동 개혁을 하다가 17년 동안 정권을 놓쳤다고 하지만 그래도 독일 경제와 역사에서 의미 있는 개혁을 완수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윤 대통령이 말하는 개혁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2003년부터 추진한 ‘하르츠 개혁’이다. 하르츠 개혁의 핵심은 해고 규제를 완화하는 등 노동 유연성을 높이고 파견 및 기간제 근무 규제를 완화해 고용률을 높이는 것이다.
사실 하르츠 개혁 수준의 노동 혁신만 실행돼도 우리 노동시장의 고질병인 이중구조는 상당수 해결될 수 있다. 기업들이 사실상 근로자를 해고할 수 없다 보니 신규 채용을 꺼리게 되고 그 대신 해고 부담을 덜기 위해 핵심 업무는 도급을 줘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이중구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괜찮은 일자리만 찾는 청년들의 고용률이 급감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현주소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하르츠 개혁의 ‘내용’보다도 그 ‘과정’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노동 개혁의 모범생으로 꼽히는 독일이나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스페인·이탈리아, 심지어 일본까지도 하르츠 개혁과 유사한 내용의 노동 개혁을 추진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부 주도의 ‘빅 스텝’ 같은 개혁
노동 개혁에 성공한 국가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정부와 전문가 주도로 개혁안이 마련돼 이른 시간 내에 실행까지 진행됐다는 것이다. 하르츠 개혁의 뼈대를 만들었던 하르츠위원회는 2002년 폭스바겐의 노무 담당 이사였던 피터 하르츠를 비롯한 15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돼 실행 방안을 만들었고 이들이 합의한 개혁안을 정부가 총대를 메고 추진해 노사 대타협을 이끌어냈다. 그나마 우리나라도 8월 ‘미래노동시장연구회’를 발족해 하르츠위원회와 비슷한 역할을 맡기기는 했다. 하지만 노동시간과 임금체계 개편 중심으로 논의 범위가 한정돼 ‘빅픽처(big picture)’까지는 내놓지 못했다. 박기성 성신여대 교수(전 노동연구원장)는 “노동 개혁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같은 노동자 참여 기구에 맡겨 놓으면 의미 있는 개혁을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프랑스도 관(官) 주도 드라이브로 성과를 낸 사례로 볼 수 있다.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은 2016년 노동시간 연장과 쉬운 해고를 골자로 한 노동 개혁안을 헌법에 규정된 ‘긴급명령권’을 이용해 의회 표결 없이 발효시켰다. 토론과 타협만 기다리다가는 어떤 성과도 낼 수 없다는 절박한 위기감에 따른 것이다.
정권 바뀌어도 개혁은 계속
개혁을 추진하는 국가 지도자가 직(職)을 걸 정도로 강력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혁신 국가들의 공통점이다.
2010년 불과 43세의 나이에 총리직에 올라 10년 넘게 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가 이런 경우다. 네덜란드의 세계적 소비재 기업인 유니레버에서 10여년 동안 일했던 뤼터 총리는 총리직을 맡은 지 2년이 지난 2012년 9월 의회에서 긴축 협상이 결렬되자 여왕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
여기서 그가 이끄는 자유민주당이 승리하면서 네덜란드의 개혁에도 탄력이 붙었다. 뤼터 총리는 2014년 실직 이전 임금의 최대 90%를 3년 동안 보장해주던 기존 해고 수당에 상한선을 도입하고 실업급여 수급 기간도 최장 38개월에서 24개월로 줄이는 개혁 방안을 도입해 노동시장을 다시 한 번 쇄신할 수 있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에서 지도자가 직을 걸 수는 없겠지만 설령 인기를 얻지 못해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더라도 특히 노동 개혁만큼은 반드시 성과를 내겠다는 결기를 윤 대통령이 평소에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처럼 정권이 바뀌더라도 노동 개혁의 정신만큼은 이어갈 수 있어야 장기적으로 끊임없는 혁신이 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령 슈뢰더 전 총리는 진보로 분류되는 사민당 소속이었으나 보수 성향인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취임 뒤에도 하르츠 개혁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됐다. 2010년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독일과 비슷한 내용의 노동 개혁을 실시했다가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대 입법으로 개혁이 유야무야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와 다른 부분이다.
개혁의 적은 불신
노동 개혁 추진 사례 중에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내용도 적지 않다. 대표적 사례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2017년 추진했던 ‘일하는 방식 개혁’이다. 아베 전 총리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재량노동제 도입 △여성 및 고령자 취업 지원 △외국 인재 영입 등을 내용으로 한 노동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 중 재량노동제 도입과 관련해 정부가 근거로 댄 각종 데이터들이 모두 엉터리로 밝혀지면서 결과적으로 개혁의 불씨까지 꺼지는 참사를 낳고 말았다.
재량노동제는 실제 일한 시간이 얼마든지 상관없이 노사 합의로 미리 정해 놓은 시간을 기준으로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는 제도다. 일본 정부는 당시 통계 조사를 근거로 재량근로제 적용 사업장의 근로자들이 더 적게 일한다고 발표했는데 실제로는 입맛대로 통계를 갖다 쓴 점이 드러나 아베 전 총리의 도덕성 논란으로 이어졌다. 국책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도 ‘분식 통계’ 논란에 따라 추동력을 잃어버렸다”며 “아무리 성과가 급해도 어디까지나 주류 경제학계의 상식을 기반으로 과학적 근거와 데이터를 가지고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