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시절인 지난해 11월의 어느 날, 한국전력·한국수력원자력의 한 이사회 멤버에게 용산 대통령실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이 인사는 당시 한국과 미국 원전 업체 웨스팅하우스가 검토하고 있는 비밀 합의의 골자에 대해 “기술 수출 제한 및 시장 분할 규제가 지나치게 과도해 우리가 불리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피력해왔던 인물이다. 전화를 받은 뒤 용산에 들어갔다 나온 이 인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주변의 물음에 “혼나고 왔다”고 짧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올 1월 한전·한수원·웨스팅하우스는 “지식재산권(IP) 관련 합의에 도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후 7개월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합의문의 원문을 최초로 취재해 공개한 것이 최근 서울경제신문 원전 관련 보도의 핵심이다. 이번 원전 보도 과정에서 담당 데스크로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국가 에너지의 핵심인 원전 산업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인 보도를 할 수 있느냐”였다. 체코 원전 수출을 포기하고 원전 생태계 복원을 중단했어야 했느냐는 질타도 있었다. 심지어 “친시장 언론인 줄 알았는데 반시장이었느냐”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진실은 그렇지 않다. 합의문의 주요 내용을 보도하기로 결정한 것은 원전 산업을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원전을 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번 보도는 무엇보다 한국과 웨스팅하우스 간 재협상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합의문 곳곳에 우리 원전 산업이 장기적으로 영향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독소 조항이 가득한 탓이다. 당장 이대로 합의문이 개정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향후 50년 동안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 시장을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 물론 웨스팅하우스는 일종의 팹리스(설계 회사)로 시공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한국과 합작법인 형태로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K원전 기업이 파운드리(위탁 생산 회사)가 돼 미국의 300기 원전 공사를 싹쓸이하면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같은 파운드리라고 해도 기술·영업 독립권을 쥐고 있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입지는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게 된다. 고객을 가려서 받는 슈퍼을(乙)로 성장한 대만 TSMC와 미국 애플로부터 생산라인에서 나오는 먼지 한 톨까지 관리 감독을 받는 폭스콘의 현재 모습을 비교해보면 간단한 문제다. 폭스콘의 성장은 애플로부터 ‘마진률 3% 이내 제한’을 받으면서 사실상 멈췄다. 폭스콘을 마른 수건 쥐어짜듯 한계까지 몰아붙인 애플은 최근 인도로 생산기지를 옮겨 최신 스마트폰인 아이폰17을 전량 현지에서 생산한다는 방침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이번 합의에서 한국 원전 1기당 최소 1조 1000억 원의 이익을 확약받고 기술 개발 및 수출에도 다양한 제약을 건 것으로 확인됐다. 현 구조에서 한국 원전의 미래는 TSMC에 가까운가, 폭스콘에 가까운가.
제대로 된 ‘한국형 원전’을 개발하기 위해서라도 합의문 개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나라가 독자 기술이라고 자랑해왔던 APR1400 노형은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시스템80’ 설계를 근간으로 해 부품 및 공정 작업의 국산화율을 95% 이상으로 높인 제품이다. 설계를 한국형으로 개량하기는 했어도 그 근본은 미국에 있다는 얘기다. 설령 미국의 원천 기술에서 100% 벗어나 새로운 원전을 만든다고 해도 이것이 미국의 기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지 여부는 웨스팅하우스가 지정한 미국 기관으로부터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합의문은 규정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주력 제품인 APR1400부터 미래 에너지로 각광받는 소형모듈원전(SMR) 시장까지 미국의 족쇄를 차고 있는 것이다.
우리 원전에 대한 정치적 공세도 배격해야 한다. 원전의 반대말은 재생에너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태양광 같은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원전의 비중은 안정적으로 늘려야 하고 이를 위해 원전 생태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원이 필요하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문 개정이 테이블 위에 올라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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