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0일만 해도 “현재 추경 편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 올해 예산안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추경을 논할 명분이 없는 데다 대선을 코앞에 둔 터라 ‘관권 선거’ 논란에 휘말릴 우려도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4일 홍 부총리는 “원 포인트 추경을 편성하기로 했다”며 말을 바꿨다. ‘돈 풀라’는 당청의 요구에 보조를 맞추기로 한 것인데 곳간 지기에 쏟아질 비판을 피하려 “반대하는 시늉만 낸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날 정부가 밝힌 추경안을 보면 소상공인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선 사회적 거리 두기로 매출이 감소한 소상공인에게 방역지원금 300만 원을 추가 지원하는 안이 포함됐다. 정부는 지난해 말 320만 소상공인에 방역지원금 명목으로 100만 원을 지원했는데 지원 규모를 4배 불렸다. 이와 별도로 영업 금지 제한 업종에 대한 손실보상금 재원도 추경을 통해 1조 9,000억 원을 추가 확보하기로 했다. 현재 손실보상 재원은 3조 2,000억 원인데 규모를 더해 5조 1,000억 원으로 늘리는 것이다. 방역 역량을 제고하기 위해 책정한 2조 원 등을 포함해 전체 추경 규모는 약 14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가 말을 바꾸면서 내놓은 이유는 세수가 예상보다 늘어 추경 재원이 새로 생겼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까지 추가 세수가 9조 원을 넘긴 데다 12월에도 최소 18조 원 이상의 세수가 더 걷힌 것으로 보여 최소 27조 원의 추가 세입이 예상된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국가재정법상 올해 추경 편성 재원으로 지난해 더 걷힌 국세수입을 활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정부는 일단 적자 국채를 발행한 뒤 4월 결산 이후 추가 세수로 발행한 국채를 상환하겠다는 입장이나 규정을 우회한 ‘꼼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발행한 국채를 초과 세수로 온전히 메우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국가재정법에 따라 초과 세수의 40%(약 11조 원)는 지방교부금 등으로 내려 보내야 한다. 남은 세수 중 5조 3,000억 원은 소상공인 지원 프로그램에 쓰기로 이미 용처를 정해놓았다. 여기에 종합부동산세와 농어촌특별세 등 지방으로 빠지는 세수를 추가 감안하면 활용 가능한 세수는 10조 원을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초과 세수로 재원 사정이 달라졌다”는 정부 해명이 석연찮은 지점이다.
설상가상 국회 심의 과정에서 추경 규모가 더 불어날 수도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이날 정부의 ‘14조 원 추경안’에 대해 "소상공인 피해 규모나 기대치에 비해 현재 추경 규모가 지나치게 적다. 추경 심의 과정에서 여야 합의를 통해 대대적 증액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며 증액을 요구했다. 대선을 앞두고 진행되는 이번 추경에 실질적으로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반영된 점을 감안하면 심의 과정에서 일정 규모의 증액은 예고된 수순으로 보인다.
여야 모두 선심성 공약을 내건 터라 대선 이후에도 정부를 향해 ‘돈을 더 쓰라’는 요구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100조 원 추경’을 결의하는가 하면 국민의힘도 50조 원 규모의 코로나19 손실보상을 공언하는 등 양당 모두 대선 이후 연내 추가 추경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올해 세수가 이례적으로 늘지 않는다면 수십조 원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빚을 더 낼 수밖에 없다. 올해 말 1,068조 원(2021~2025 국가재정운용계획)으로 예상되는 국가 채무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 같은 추세라면 국가 채무가 1,100조 원을 넘어서는 것은 시간문제”라면서 “돈을 뿌리려 국채를 찍어낼수록 국채 값이 하락하고 민간 금융기관의 건전성도 훼손돼 위기를 증폭시킬 것”
나랏빚을 전에 없이 늘리겠다면서도 당청뿐 아니라 정부마저 이에 대한 대책은 내놓지 않고 있다. 당장 국채 시장 급등부터 우려된다. 시중에 국채 물량이 늘어나면 국채 가격은 떨어지고 국채 금리는 오른다. 국채 금리가 뛰면 은행채와 회사채 금리가 모두 영향을 받고 연쇄적으로 대출 금리까지 오를 수 있다. 채권시장에 밝은 한 관계자는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면서 딜러들한테 ‘나중에 인센티브를 줄 테니 사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시장 반응이 전과 같지 않다”면서 “찍어낸 국채가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으면 후폭풍이 클 텐데 누구도 대책을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 더 들어왔다며 추경을 서두르는 것은 재정 운용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라면서 “추경을 서두르기보다는 올해 책정한 지원 예산을 질서 있게 집행하는 데 우선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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