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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미국 주간지 '라이프&스타일'에 실린 사진 한 장이 국내에서 큰 화제가 됐다. 미국 인기 배우 브룩 실즈가 잡채와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 미국 뉴욕의 한인상점에서 당면과 고추장을 고르는 장면이었다. 당시 정부는 "실즈가 비빔밥을 맛본 후 한식이 좋아 직접 만들기도 하고 특히 고추장 맛을 좋아한다"고 대대적으로 알렸다. 이에 한식이 세계인의 음식으로 부상했다는 자부심이 국내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하지만 2년이 지난 2013년 감사원 조사 결과 실즈의 사진이 의도적 연출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K푸드를 홍보하려는 우리 정부의 의뢰로 연출된 것이고 여배우는 "한식을 좋아한다"는 말조차 한 적이 없었다는 게 밝혀졌다. 특히 당시 대통령 부인인 김윤옥 여사 주도의 한식재단이 무리하게 추진했던 뉴욕 한식당 설립도 무산되자 한식 세계화가 '졸속행정'의 희생양이 됐다는 비난이 높았다.
한식 세계화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정부가 2009년 이후 글로벌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한식 세계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매년 막대한 금액을 쏟아부었지만 뚜렷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오히려 한식 이미지만 나빠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올해 역시 정부가 연초부터 K푸드 해외진출의 불씨를 살리겠다며 전략수정 카드를 꺼냈지만 전문가들은 반신반의한다. 정부의 새로운 K푸드 키워드는 '한식 진흥 및 음식 관광 활성화'. 이를 위해 한식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 등도 추진된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그동안 한식 홍보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궁중·제례·사찰 등 우수 K푸드를 발굴, 상품화하는 데 주력할 방침"이라며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하는 외국인 농촌체험이나 테마거리 등과 연계해 해외 관광객들에게 한식의 우수성을 전파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의 호언장담에도 국내 식품·외식업계의 시선은 싸늘하다. 정부가 보여주기식 이벤트에만 치중하면서 한식 세계화가 제자리를 맴돌고 있어서다. 그 결과 지난 6년간 정부가 한식 세계화를 외치며 1,200억원이나 투입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일본·태국 등 경쟁국에 비해 음식 세계화 추진기간이 짧아 K푸드가 일본의 '스시'나 태국의 '팟타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경쟁국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해 로드맵을 다시 짜고 새롭게 한식 세계화를 추진하는 등의 방향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일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4월 일본을 찾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도쿄 긴자의 작은 스시 전문점으로 초청했던 '스시 외교'가 좋은 예다.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 때 정부 주도로 서양인을 위한 철판 요리를 개발하는 등 일찌감치 일식 세계화 작업에 돌입했다. 또 1981년에는 외식전문연구센터를 설립해 세계화 전략을 수립했고 2006년부터는 '트라이 재팬스 굿푸드' 사업을 추진, 해외 현지 상류층을 겨냥한 일본 식문화 보급과 식품수출 진흥 등을 지원하고 있다.
태국 역시 2003년부터 '식품산업 경쟁력을 키워 전 세계 식품 산업을 리드한다'는 '타일랜드 키친 오브 더 월드 프로젝트'를 벌여왔다. 이와 관련해 태국 정부는 글로벌타이레스토랑협회를 만들어 해외 외식 프랜차이즈 산업을 발 벗고 돕고 있다. 또 태국식 인테리어와 태국 출신 요리사 채용 등의 요건을 일정 부분 충족한 레스토랑에 부여하는 '타이 셀렉트' 인증제도도 도입했다. 2004년 이후 현재까지 타이 셀렉트를 받은 태국요리 전문점은 국내 7곳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484곳에 달한다. 태국은 타일랜드 키친 오브 더 월드 정책 아래 꾸준히 태국음식 세계화를 추진한 결과 식품·외식 분야에서만도 250억달러(2013년)의 수출액을 기록했다.
반면 수년간 진전되지 못한 K푸드의 현주소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2012년 미국 CNN의 문화·여행 생활정보 사이트 'CNN Go'가 꼽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50가지 음식' 리스트에 한국음식은 없다. 당시 조사에서 태국의 '마사만 커리'가 1위, 일본의 스시는 4위에 올랐다. 중국의 훈제오리 '베이징덕'은 5위였다. 아시아 국가 중 태국과 일본 음식이 각각 4개와 3개, 인도·홍콩·베트남이 각각 2개 선정됐지만 김치·불고기·비빔밥 등 한식은 단 하나도 오르지 못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오랜 시간을 두고 추진해야 하는 한식 세계화에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전시·홍보성 위주의 단기전략으로 접근했다"며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면 교민을 활용한 방안을 만들거나 주요 식품박람회에만 참가하는 등의 내실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는 2017년까지 세계 5대 식문화 반열에 올려놓겠다는 거창한 목표보다 구체적이고 시행 가능한 하위목표부터 세우는 전략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외국인 선호보다 정부가 원하는 전통 품목만 고집하면서 한식 세계화에 실패했다는 부분도 반성할 대목"이라며 "한식 세계화에 대한 국내외 인프라를 확대하는 동시에 한식 식재료의 대량 생산과 안정적이고 신속한 공급 등이 가능하게끔 효과적인 식재료 수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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