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4개 대학 총장들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제기되는 ‘대학 역할론’과 관련해 “AI 시대에는 ‘소통플랫폼’으로서의 대학 역할이 더욱 부각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학생들이 AI와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기 위해 ‘비판적 사고’ 함양을 위한 훈련에 보다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25일 서울경제신문이 ‘AI시대, 대학의 역할론’을 주제로 연세대·성균관대·서강대 등 9개 사립대 총장 및 부산대·충북대 등 4개 국공립대 총장과 긴급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이들은 AI 시대에 대학의 역할이 보다 확대될 것이라 진단했다. 윤동섭 연세대 총장은 “전문 지식 제공만 놓고 보면 AI가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에 대학 교육의 무게 중심을 협업능력, 윤리적 판단, 체화된 지식과 같이 인간이 잘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옮겨야 한다”며 “무엇보다 학생들이 AI를 ‘사고를 확장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대학 교육 체계를 재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상규 중앙대 총장은 “대학은 다양한 경험과 토론을 바탕으로 가치관 형성은 물론 비판적 사고를 훈련하는 ‘지적 성숙의 공간’”이라며 “AI시대에는 특정 전공 지식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인문학, 사회과학, 데이터 과학, 공학 등의 융합한 ‘통섭적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동원 고려대 총장은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고유의 역량인 리더십·윤리·소통·협상과 같은 능력은 결코 대체될 수 없다”며 “향후 대학은 AI 시대의 위험을 관리하고 미래의 가치를 설계하는 핵심 사회 인프라로서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산업화 시대 ‘인재 양성책’에 매몰된 한국
“한국 대학 글로벌 순위 하락의 핵심 원인은 재정 투자입니다. 오랜 등록금 동결의 여파로 대학은 우수교수 유치와 연구 인프라 개선에 투자할 여력이 부족합니다. 막대한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싱가포르 대학이나 기부금 규모가 큰 영미권 대학에 비해 한국 대학은 재정 여력에서 밀리는 상황이며 결국 인재 유출이라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유지범 성균관대 총장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한국 대학의 경쟁력이 뒷걸음질 치고 있는 원인에 대해 이 같이 진단했다. 실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2025년 우리나라 대학의 경제적 측면 글로벌 경쟁력 순위는 58위로 홍콩(9위), 대만(14위), 중국(16위)에 비해 크게 낮다.
특히 우리나라 대학교육은 일정 수준 이상의 인재를 대량 양산해 시장에 공급하는 이른바 ‘산업화 시대’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나라 대학교육 이수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8.5%를 크게 웃도는 70.6%이지만, 대학생 1인당 공교육비 지출액은 1만4695달러로 OECD 평균인 2만1444달러 대비 크게 낮은 실정이다. 이에 대해 대학 총장들은 AI 시대에 대응해 교육 커리큘럼을 혁신하는 것과 동시에 AI와 차별화된 경쟁력 확보를 위한 규제개혁 및 대규모 투자 등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24일 서울경제신문이 ‘AI시대, 대학의 역할론’을 주제로 13개 대학 총장들과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이들은 대학 자율성을 확대하는 한편, 대학 고유의 경쟁력 강화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준규 가톨릭대 총장은 “많은 대학이 수직적·관료적 구조에 갇혀 운영 혁신이 연구 혁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AI 시대의 글로벌 대학 경쟁은 ‘누가 더 큰 연구 생태계를 구축했느냐’로 판가름 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향숙 이화여대 총장은 “AI 시대에는 대학의 유연성과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하고, 연구와 교육에 집중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각 대학이 고유한 강점을 살려 특화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교육 커리큘럼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최재원 부산대 총장은 “AI 도래로 현재 대학 교육은 일종의 ‘변곡점’을 맞이했다”며 “결국 AI가 대체 못하는 사람간의 관계성이 한층 중요해 질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혁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석환 대진대 총장은 “AI 시대에는 더욱 많은 학습 기회 제공을 위해 대학간, 지역간 물리적 칸막이가 없어져야 한다”며 “해방 이후 80년 가량 이어져 온 초중고 학제 개편 외에 대학교육 또한 집단교육에서 벗어나 개인맞춤형 교육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대학은 AI가 못하는 통찰, 윤리, 사고력 배움터
대학에서 창의적 AI 활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기정 한양대 총장은 “AI는 단순한 ‘정답 검색기’가 아닌 ‘사고 촉발기’가 돼야 한다”며 “최근 일부 대학의 AI 활용 부정시험 이슈 또한 ‘AI에 대한 금지가 아닌 AI를 어떻게 책임감 있게 활용할 것이냐’는 관점의 전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심종혁 서강대 총장은 “AI가 삶의 전 영역에 스며든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다양한 시각 및 전망을 융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소통플랫폼이 꼭 필요하다”며 “대학은 이 플랫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장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문시연 숙명여대 총장 또한 “결국 AI 시대의 경쟁력은 인간 고유의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를 어떻게 확장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앞으로 대학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사고력, 통찰, 윤리, 복합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공간으로 재정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AI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경계해야 하며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인재 수요는 늘어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김왕준 경인교대 총장은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산업계에서 코딩 인력 양성이 중요하다고 외쳤지만, AI가 활성화 되면서 코딩 인력은 이제 필요 없어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실정”이라며 “인재 양성시 특정분야만을 강조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보다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한 지방 거점 국립대 총장은 “AI가 비행기를 설계했다 하더라도 이 설계도의 안전성 및 정확성 여부는 사람이 꼭 검증해야 한다”며 “대학을 나와 전문지식을 쌓은 이들에 대한 ‘양적 수요’는 줄어들지 몰라도 ‘질적 수요’는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의 IT 기업 팔란티어가 “대학은 더 이상 신뢰할 인재를 육성하지 못한다”며 고졸자 대상의 ‘메리토크라시 펠로우십’을 운영하는 등 산업계에서는 이른바 ‘대학교육 무용론’도 커지고 있다. 팔란티어는 고졸 학생 중 20여명을 선발해 넉달간 월 5400달러의 급여를 제공한 후 성적에 따라 팔란티어 정직원으로 채용하며 대학 교육 자체를 대체하려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고창섭 충북대 총장은 “대학은 ‘지식을 전달하는 곳’을 넘어 ‘질문을 창조하는 곳’이기 때문에, 팔란티어를 비롯한 빅테크의 새로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역할은 더욱 분명해 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이 같은 AI 확산은 결국 대학 양극화로 이어져 대학별 구조조정을 촉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도연 전 교육부 장관은 “AI가 향후 엄청난 역할을 할 것인데 결국 해당 기술을 빨리 받아들이는 대학이 유리할 것이며, 이 또한 현재 잘하고 있는 대학 중심으로 진행돼 실력이 없는 대학은 버티기 힘들 것”이라며 “대학은 이제 지식 전달 역할자 역할에서 벗어나 단순 시험문제부터 학생평가까지 많은 것을 빠르게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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