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흑갈색 찻잔 안쪽에 뽕잎 한 잎이 고스란히 자리했다. 1200도가 넘는 불길 속에서 이파리가 녹아들며 새겨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무늬다. 중국 송나라 시대 유행한 이 흑유(黑釉) 찻잔 ‘목엽천목(木葉天目)’은 불과 흙과 자연이 빚어낸 우연의 미학을 담고 있어 선(禪)을 수행하는 동양 선승들이 애용했다. 다만 제작 방법은 중국에서도 명맥이 끊겼는데 대한민국 다기 명인 제20호이자 경상북도무형유산인 김대철 사기장 전수자가 5년 여의 연구 끝에 2017년 재현해냈다. 김 명인은 “100개를 구워도 하나 성공하기 어렵고 마음에 드는 작품은 1년에 하나 겨우 완성한다”면서도 800년 전 도자 기법을 한국 장인이 되살렸다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과거와 현재를 예술로 연결하는 전시 ‘K-헤리티지 아트전 - 이음의 변주’가 포항문화예술팩토리 아트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 22인의 작품 7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전시는 제목에서 보듯 명맥이 끊기거나 끊어질 뻔한 기술을 잇는 ‘계승’과 시대에 맞춘 ‘변주’가 핵심 주제다. 김대철 명인처럼 사라질 뻔한 전통을 지키는 인물부터 3·4대를 이어 전통을 새롭게 변주해가는 장인들의 이야기가 전시장 곳곳에서 펼쳐진다.
국가무형유산 제60호 보유자 박종군 장도장(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만드는 장인)과 이수자인 두 아들 박남중·박건영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박종군 장도장이 1대 고(故) 박용기 장인의 뒤를 이어 2대로 활약 중이며 전통 장도를 통한 충절·의리·정절의 정신은 3대로 이어지고 있다. 활과 화살을 제작하는 장인인 궁시장 유세현도 고 유영기 보유자의 아들로 4대째 장단 화살의 전통을 잇는 중이다. 유 장인은 이번 전시에서 조선 왕실 의례에서 왕이 사용했던 ‘어시(御矢)’ 등을 선보인다.
장롱, 책상 등 목가구를 제작하는 소목장 조복래와 조현영 작가도 못 하나 쓰지 않는 전통 목공예를 계승하고 있는 부자다. 조복래 장인은 목재의 자연스러운 결을 최대한 살리는 제작 방식을 쓰는데 이번 전시에는 짙은 황갈색 느티나무 문짝에 구름처럼 소용돌이치는 듯한 무늬가 아름다운 책장이 자리했다. 최소 수백 년 수령의 나무를 찾아 최소 10년을 건조시켜 최상의 무늬를 발견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아버지와 함께 나무를 골라내는 일부터 배우고 있는 이수자 조현영 작가는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사방 탁자를 선보였다.
전시는 ‘불과 철의 도시’라는 포항의 정체성에도 주목했다. 예비사회적기업 세이버스코리아와 한국헤리티지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는 전시는 2023년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첫 선을 보인 후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 등으로 이어졌고 올해는 포항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번 전시에서 ‘화염의 예술’로 불리는 도자와 스테인리스 스틸을 소재로 한 조각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다. 조선시대 명맥이 끊어진 고려 흑자를 현대에 부활시킨 김시영 장인의 대형 도자 세 점과 그의 딸인 김자인 작가의 독특한 푸른 빛의 회화가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 눈길을 끈다. 포항의 중진 조각가 사공숙은 제철소의 쇠와 바다의 물결을 떠올리게 하는 테트라포드 형상의 스틸 조각 '물결 너머' 6점을 선보인다.
전시를 기획한 정우성 세이버스코리아 대표는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계속 활약하는 생태계를 키우는 것이 목표”라며 “한국 장인들의 기술과 정신을 세계에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7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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