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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잔해 식기·제비 둥지…지역작가 17인, 서울에 닿다

■아르코 '지역예술도약지원' 성과展

중견 작가의 창작 도약 지원부터

전문 자문을 통한 전시·기록까지

'2025 아르코 리프'로 3색 전시

일민미술관 등서 내달 10일까지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송성진 작가의 전시 '(무)관심영역'의 전경. 라오스에 대한 리서치를 기반한 최신 설치작업 '폭탄을 옮기는 방법'을 비롯해 버려진 밭을 바닥 프로젝션 영상으로 구현한 후 그 위로 평균대를 설한 '풀 위를 걷는 기술' 등 평온한 듯 보이면서도 위태로운 일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대거 자리했다. /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구지은 작가의 '뉴제비타운' 전시 전경. /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여러 개의 의자가 놓인 긴 식탁 위로 은빛 알루미늄 식기가 정갈하게 놓였다. 언뜻 평화로운 식탁 풍경이지만 이 식기들이 60여 년 전 라오스에 쏟아졌던 폭탄의 잔해를 녹여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시선이 달라진다. 부산에서 주로 활동하는 송성진(51) 작가는 식탁이라는 일상 위를 전쟁이 가로지르는 작품 '폭탄을 옮기는 방법'을 통해 사라지지 않는 장소의 역사가 그곳의 사람들을 어떤 삶으로 밀어내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이끈다.

작품이 전시된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약 1km 떨어진 삼청동 금호미술관에서는 또 다른 '공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빛나는 원기둥 수십 개가 둥지처럼 쌓인 '뉴제비타운'은 울산 기반의 구지은(39) 작가가 3년간 전국을 오가며 추적한 제비의 서식지 기록이다. 배전함·전선 등에 둥지를 튼 제비들의 파편화된 이미지가 빙글 돌아가는 원기둥 안을 채운다. 기후변화로 거주지를 옮긴 제비를 바라보며 인간과 비인간이 균형을 이루는 미래를 그린다.

지역 시각예술의 현주소를 만날 수 있는 대규모 전시가 서울 전시문화의 중심지인 광화문·삼청동에 도착했다. 일민미술관·금호미술관·학고재아트센터에서 지난 12일 동시 개막한 '2025 아르코 리프(ARKO LEAP)'는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각자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중견작가 17인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전시장은 세 곳이지만 다루는 주제는 광범위하다. 전쟁의 상흔, 기후위기, 여성의 노동, 도시의 욕망, 인간의 불안까지. 광역문화재단 14곳이 엄선해 지원해온 '전국구' 작가들의 축적된 작업 세계가 새로운 맥락으로 펼쳐진다.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은 ‘2025 ARKO Leap’ 지역예술도약지원사업 참여 작가 17인이 자신들의 작품 세계를 직접 설명하는 영상과 출판물 등이 자리한 아카이브존을 운영하고 있다. /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가 올해 새롭게 출범한 '지역예술도약지원사업'의 첫 성과전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아르코는 이번 사업을 통해 지역과 중앙의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공백을 메우고 중복을 지우는, 효율적인 지원 모델을 완성하겠다는 포부다. 지역문화재단이 작가 발굴과 창작 지원을, 아르코는 기획자·비평가 네트워크 연결과 전시 공간 매칭 등 지역에서 충족되기 어려운 성장 인프라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아르코 측은 "작가의 잠재력을 가장 잘 아는 지역이 작가의 성장을 돕는1단계 지원을, 중앙이 확장·정교화를 위한 2단계 '점프업' 자원을 제공하는 구조"라며 "지역의 발굴과 중앙의 도약을 연결해 지역 예술 생태계를 활성화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아르코는 앞으로 전국 시·도립미술관까지 협력을 확대해 지역 작가들이 서울을 너머 해외까지 진출하게끔 도울 계획이다.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홍희령 작가의 '잠 못 드는 밤' 전시 전경. 침상에서 불쑥 떠오르는 부끄러운 기억과 심상을 간헐적 한숨과 들썩이는 이불의 움직임으로 표현한 'Kick, Kick, Kick'과 대형 커튼 작업인 'On The Border'를 통해 불면에 대한 공감각적 공간을 구현했다. /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 삼청동 금호미술관에서는 강원 기반의 김주환 작가의 전시 ‘바르도: 두 집 사이’가 열리고 있다. 김주환 작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균열과 왜곡을 탐구하며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조형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현태 작가가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나선정원’의 전경. 작가는 웹프로그래밍 언어를 활용해 온라인 환경 속에서 작동하는 복잡계적 오디오비주얼 장치를 구축한다. 이번 전시에는 ‘천일야화’ 서사를 모티프로 얘기할 수 없는 시간과 생의 운동을 감각적·비선형적 소리 환경으로 구현한 ‘세헤라자데 장치’ 등을 만날 수 있다. /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작은 산뜻하다는 평가다. 우선 지난 6개월을 함께 달려온 작가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이들은 이번 사업이 다른 지역 작가들과 교류하는 기회가 된 동시에 전문 비평가 및 기획자의 예술적 조언을 받아 기존 작업을 더 넓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무엇보다 서울 미술 중심지의 잘 기획된 전시 공간에서 제대로 된 작품을 통해 더 넓은 관람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감이 컸다. 이들은 서울 전시 경험이 많지 않거나 있더라도 소규모 갤러리나 대안공간 등에서 주로 진행해 아쉬움이 많았다고 토로했다.

실제 참여 작가 대부분은 기존보다 한층 스케일을 키운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기술과 결합한 대형 설치작품을 통해 긴장, 불안 등 인간 심리를 탐구하는 홍희령 작가의 경우 과거 소규모로 진행했던 불면과 관련된 설치 작업을 3m 높이의 커튼과 거대한 침대로 확장했다. 강원 기반의 김주환 작가 역시 나무와 흰색 플라스틱 오브제 등 다양한 재료로 완성한 강한 흑백 대비의 설치로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의 욕망 사이의 긴장감을 드러냈다. 이번 사업에서는 10~20년 화업이 쌓인 작가들이 본인들의 작품 세계를 집대성할 수 있도록 아카이빙(기록) 및 출판 프로젝트도 지원했다. 기존 설치작업을 가상 공간에서 확장·재현한 디지털 아카이빙 '몽주버스'를 선보인 손몽주 작가는 "눈앞의 창작에 매진하느라 정작 나의 지난 작업의 자료화와 셀프브랜딩에 미진한 부분이 많았는데 작가로써 한층 탄탄한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전시의 질도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단순히 지역 작가를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관람객들이 만족할 만한 매력적인 전시로 만들기 위해 여러모로 공을 들였다. 최혜인 일민미술관 큐레이터는 "내공이 있는 작가들이 '지역 작가'라는 이유로 조명받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많은 소통을 했다"며 "각 작가의 세계를 보여주는 개인전을 너머 '장소성'의 다양한 층위를 만날 수 있는 그룹전으로도 관람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10일까지 무료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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