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주요 작가들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전시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사진첩에 담긴 그리움, 천경자의 화려했던 삶과 예술혼, 김창열 물방울 탄생의 여정까지, 세 작가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연휴를 활용해 세 전시를 둘러보며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한 단면을 입체적으로 이해해보는 건 어떨까.
나혜석 사진첩 첫 공개.. 동시대 작가들과 교차한 그리움의 시간
수원시립미술관에서는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의 유일한 유품인 사진첩을 매개로 그녀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2017년 유족에게 기증받은 사진첩은 2년간 복원과 연구 끝에 101점의 서사로 재탄생했다. 사진이 포착한 순간의 그리움과 애틋한 감정이 동시대 작가 13인의 작품 55점과 어우러져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전시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은 사진첩에 담긴 나혜석의 삶을 4개 장으로 풀어낸다. 1장 '한 예술가의 사진첩'은 만년의 나혜석이 수전증을 앓으며 제작한 사진첩을 소개한다. 96장의 사진과 101건의 자필 설명에는 남편 김우영의 일본 유학 시기부터 1930년대 해인사 체류까지의 순간이 담겼다. 대부분 가족 사진인 이 기록은 나혜석이 품었던 그리움의 증거다.
2장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평범한 순간으로부터'는 나혜석처럼 가족을 그리워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나혜석, 박수근, 배운성, 백영수, 이중섭, 임군홍, 장욱진이 그린 가족은 창작의 출발점이자 위안이었다. 6·25 전쟁 발발 보름 전 명륜동 자택에서 아내와 자녀를 그린 임군홍의 미완성작 '가족',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백영수의 연작 '모성의 나무' 등을 만날 수 있다.
3장 '여정의 어딘가에서'는 사진첩 속 장소를 매개로 전개된다. 나혜석의 사진첩에는 세계 일주의 순간뿐 아니라 전국 명승과 사찰을 찾아다니며 작품 소재를 구한 장면이 담겼다. 이 여정에서 교유한 배운성, 백남순, 이종우, 서진달, 이응노의 작품이 함께 전시된다. 마지막 장 '나를 잊지 않는 행복'은 나혜석처럼 여행을 통해 예술가로 단련한 박래현, 천경자를 조명한다. 박래현이 1960년대 세계 여행 후 동양적 추상을 모색한 '작품 16'과 천경자의 '여인상', 기행 스케치가 소개된다. 미술관은 3~9일 정상 개관하면서 추석 당일 무료 입장 이벤트를 연다. 전시는 내년 1월 11일까지.
20년 만에 돌아온 '스타 화가' 천경자의 세계
한국화 거장 천경자(1924~2015)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심도 있게 들여다보는 특별전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도 열리고 있다.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작고 10주기를 맞아 준비한 이번 회고전은 2006년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채색화 80여 점과 삽화·표지화·사진 등 아카이브 자료 15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1998년 작품과 저작권을 서울시에 기증하며 한국 미술사 처음으로 예술 혼을 사회에 환원한 작가를 다시 만나볼 기회다.
천경자는 당대 최고의 스타 화가였다. 개인전마다 인파가 몰렸고 여대생들은 노트에 그의 그림을 베껴 그렸다. 그러나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독보적 업적은 가려지고 논란만 따라다녔다.
전시는 8개 장면으로 천경자의 화업을 재조명한다. 첫 장은 '저작권과 작품을 사회에 환원한 최초의 화가'라는 설명을 달며 작가의 업적에 집중한다. 이어 흥행 작가, 베트남 전쟁 종군 화가, 25년간 세계를 누빈 여행가, 문인들과 교류한 수필가 등 다채로운 면모를 풀어낸다.
하이라이트는 5장 '운명의 굴레를 벗어던진 당당한 여성초상화'다. '미인도'가 아닌 '여성초상화'로 명명한 이 공간에서 대표작 '고(孤)', '길례언니Ⅱ', 자화상 '막은 내리고' 등을 만날 수 있다. 각 공간에는 천경자와 인연 깊은 7인의 증언과 소설가 박경리의 헌사도 함께 전시된다. 서울미술관은 연휴 기간 휴무 없이 문 연다. 전시는 내년 1월 25일까지.
물방울 탄생의 여정을 만나다…김창열 회고전
자신만의 예술 언어인 물방울로 세계 미술계에 깊은 인상을 새긴 한국의 거장 김창열(1929~2021)의 생애와 예술 여정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귀한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타계 후 첫 대규모 회고전으로 미공개작 31점을 포함해 120여 점을 선보인다. 해방과 전쟁,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에서 시작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를 파고든 뉴욕 시기를 거쳐 마침내 탄생한 물방울의 여정을 깊이 있게 따라간다는 점에서 기존 전시와 차별화된다. 50여 년간 물방울만 그린 화백의 예술 여정이 지닌 의미를 깊이 사유해볼 기회다.
전시는 네 개 장으로 구성된다. '상흔'에서는 작가의 초기작과 시대적 배경을 살핀다. 첫 공개되는 1955년 작 '해바라기', 경찰 시절 그린 표지화, 19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출품작 등을 만날 수 있다. '현상'은 물방울의 전조를 보여준다. 거친 앵포르멜에서 기하학적 추상으로 전환한 작품들이 흐르고 녹아내리다 원형을 이룬다. 최초의 물방울로 알려진 '밤에 일어난 일'(1972)보다 앞선 1971년 물방울 두 점도 공개된다.
'물방울'에서는 초기의 끈적이는 물방울부터 투명한 후기 물방울까지 순차적으로 전시된다. 파리 아틀리에를 재현한 공간도 마련됐다. '회귀'에서는 언어와 물방울을 결합한 천자문 작업 연작을 선보인다. 김창열의 아들이자 영화감독인 김오안이 브리지트 부이요와 공동 연출해 4년간 김창열의 작업과 철학을 따라간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하이라이트도 이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관은 명절 당일인 6일 휴관하고 5일과 7~8일 문 연다.전시는 12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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