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주한일본대사관 주최로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리셉션’에서 영상 기념사를 통해 “양국이 두 손을 맞잡고 더 나은 미래로 함께 나가자”고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그러면서 “그간의 성과와 발전을 바탕으로 한일 관계에서 안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발전이 이뤄지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이 대통령이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위해 출국하느라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축사를 보낸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국익 중심 실용주의 외교 노선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 다음 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왔다”며 “하지만 아무리 어제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느냐”는 내용이 담긴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다. 일본에게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 5억 달러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밑거름이 됐다. 이 자금은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쓰여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한일 협정을 통해 양국은 협력과 화합·미래로 향하는 길을 열었지만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과거사의 상처는 양국 관계의 진전을 어렵게 했다. 북핵 등 지정학적 위기에 한미일 협력을 통해 대응해왔지만 완전하게 치유되지 않은 과거사는 양국 사이 해소되지 않는 갈등을 낳았고 그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미국을 중심으로 양국이 이뤄온 협력 체계는 중국과 북한을 견제할 수 있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민주주의 진영의 핵심 축으로 역할하고 있다. 외교통상부 차관을 역임한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한일 전략적 파트너십을 진지하게 강구할 때가 왔다”며 “동북아·동아시아·인태 지역의 전략적 불확실성, 변동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협력밖에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흐름은 최근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굳건한 한미 동맹을 토대로 한일 협력을 다지겠다는 일관된 입장을 보이는 것과 맞닿아 다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9일 첫 통화에서 앞으로도 한미일 협력의 틀 안에서 다양한 지정학적 위기에 대응해 나가기 위한 노력을 더해나가자는 데 뜻을 모았다.
특히 최근에는 ‘신냉전’을 방불케 하는 미중 전략 경쟁 심화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북한 핵·미사일 문제의 지속 등 동북아 지역이 복합적인 도전에 직면하면서 양국의 협력 필요성은 더욱 커지는 상황이다.
당장 일본이 중국 견제를 염두에 두고 한반도와 동중국해·남중국해 등을 하나의 ‘전쟁 구역’으로 통합해 대응하는 ‘원 시어터’ 구상은 한일 관계의 안정적 구축에 대한 가늠자가 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한반도를 일본 전쟁 구상에 편입시키는 것과 관련해 우려스럽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원 시어터는 한국과 미국·일본·호주·필리핀 등이 중국에 대항해 방위 협력을 강화한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북핵 위협과 미중 경쟁, 트럼프 미 행정부의 일방주의 정책이 심화하는 국제 정세를 고려하면 도전 과제가 겹치는 양국이 협력하는 게 상호 국익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한일이 공유하는 전략적 이익이 워낙 크기 때문에 (관계를) 더 악화시킬 이유가 없다”며 “서로 간 이해와 이익이 공유되고 전략적 소통을 해야 하는 관계이기에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이 한일 관계에서 강하게 작동하는 세팅”이라고 봤다.
전문가들도 갈등 현안이 발생하더라도 이재명 정부가 대일 정책을 급격히 전환할 가능성은 적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실용주의 외교가 이어진다면 앞으로 양국의 협력 관계가 공고해질 것이라는 관측도 높다.
다만 역사 왜곡으로 비판받는 일본 교과서나 독도 영유권 주장, 유력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및 공물 봉납 등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갈등 요소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안정적 한일 관계를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재명 정부가 윤석열 정부의 강제 동원 해결책인 제3자 변제 방식과 관련해 강경 기조로 나갈 경우 등도 양국의 협력 관계를 악화시킬 갈등 요소가 될 수 있다. 국익 중심 실용 외교를 펼친다고 하더라도 역사 문제는 한일 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양국 모두 국내 여론을 외면하기 어려운 만큼 냉철하게 국익을 따져보고 자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가면서 (대일 외교 기조가) 극과 극으로 바뀌었고 다시 좌회전하기에는 부담이 크다”며 “그만큼 양국 간 폭발력 있는 위험 변수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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