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노사 간 교섭 결렬로 미 서부 항만 29곳이 멈춰서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태프트·하틀리법’을 발동해 노사 분쟁에 직접 개입했다. 로스앤젤레스(LA) 등 서부 항만은 물류의 요충지로 미 컨테이너 수입의 40%를 담당한다. 10여 일간의 항만 폐쇄로 100억 달러 이상 손실이 발생하고 군수물자 수송까지 어려워지자 대통령이 강제 수단을 꺼내든 것이다. 1947년 제정된 태프트·하틀리법은 국가 비상사태 시 대통령이 법원에 파업 중단 명령 등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다. 당시 법원이 부시 대통령의 요청을 수용해 80일간의 강제 업무 복귀 명령을 내리면서 항만 폐쇄는 일단락됐고 노사는 그해 11월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미국은 이처럼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경제적 영향에 따라 정부와 법원이 개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다. 1935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는 노조 결성과 단체행동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노사관계법을 제정했는데 이후 노조의 정치적 영향력이 극대화하자 이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태프트·하틀리법이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이 카드를 실제로 꺼낸 사례는 많지 않으나 태프트·하틀리법 제정은 그 자체로 노사 간 균형을 맞추는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달리 우리의 경우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해도 정부나 법원이 파업에 개입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은 미비하다. 의료·물류 등의 분야에서 파업 시 정부가 ‘업무개시명령’을 내릴 수 있으나 이는 공공의 생명·건강·안전 보호 목적으로 제한된다. 2022년 화물연대 파업에서 화물차운수사업법상의 업무개시명령이 발동된 사례가 있지만 이마저도 노동계의 반발로 이재명 정부에서는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 주도로 추진되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이 파업의 장벽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점이다. ‘노란봉투법은 불법 파업 면책법’이라는 보수 진영 일각의 과격한 주장을 되풀이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파업에 대한 사용자의 손해배상청구를 제한하고 하청 노동자에 대해 원청이 교섭 당사자 의무를 갖게 되면 파업의 구조적 확장이 시작되는 것은 분명하다. 플랫폼 근로자와 하청 근로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파업이 벌어질 수 있다. 진영을 떠나 노동계 전문가들이 노란봉투법을 우리 노사 관계를 완전히 뒤흔들 분기점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장 이번 한미 관세 협상의 일등공신인 K조선부터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파업의 위험성에 노출된다. 조선업은 하청 구조가 복잡한 대표적인 산업으로 국내 조선 3사가 직접 고용하는 비율이 낮고 대부분이 1~3차 하청 업체 비정규직이다. 용접·도장·선체조립·전기설비 등 각 공정이 세분화돼 있고 각 공정마다 하청과 재하청이 존재한다. 이들은 지금까지 법적으로 하청 업체 근로자이기 때문에 원청과 교섭하기 어려웠으나 노란봉투법이 시행되면 원청을 상대로 협상과 쟁의가 가능해질 수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만약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조선업 하청에서 대규모 연대 파업이 발생해 우리 조선소가 마비된다면 정부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 정치 구도에서 노란봉투법이 거스르기 힘든 흐름이라면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하다. 대규모 파업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정 기능을 강화하고, 파업의 국가 경제적 영향이 커졌을 때 이를 제어할 수단을 명문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의 경우 연방중재조정국(FMCS)이 1년에 1300여 건의 쟁의에 사전 개입하며 이를 통해 5억 달러 이상의 경제 손실을 막는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도 노동위원회가 이 기능을 담당하지만 현재의 권한과 인력으로 노란봉투법 이후 상황을 대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민주당과 정부가 지금이라도 노동권과 국가 경제 사이의 균형을 확보할 방안을 고민하길 바란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겠다며 다른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드는 것이 대안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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