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을 개척한 1세대 작가이자 ‘단색화 거장’ 하종현의 중요한 초기 작업을 한 자리에 모은 기획 전시가 14일부터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시대와 호흡하면서도 끝없이 탐구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완성해가는 ‘젊은’ 하종현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전시 ‘하종현 5975’는 작가가 대학을 졸업한 1959년부터 그의 대표작 ‘접합’ 연작을 시작한 1975년까지의 시간을 구분해 총 4부로 구성된다. 초기 작업물을 시간 순으로 배치해 작가가 다루는 물질과 회화적 기법이 한국의 시대적 맥락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발전했는지를 탐구할 수 있게끔 했다. 시대 흐름에 발맞춰 다채롭게 변화하는 작품들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작가의 지난 세계가 사회적 현실과 개인적 경험을 바탕 삼아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실험들로 가득 차 있음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구체적으로 전시 1부에서는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가 전후 유럽에서 등장한 앵포르멜 운동의 영향을 받아 전개한 회화 5점을 만날 수 있다. 앵포르멜은 전후의 황폐한 현실을 반영해 정형화된 회화의 틀을 거부하고 물질성과 즉흥성을 강조한 예술 경향이다. 하종현은 물감을 두껍게 바른 실 덩어리를 불에 그을려 거친 질감을 만드는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에 대한 실험을 통해 한국전쟁 이후 혼란과 불안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2부는 1960년대 후반 산업화 시대의 고속 성장을 주제로 삼아 진행했던 높은 채도의 추상 작품들이 전개된다. 도시의 형성과 변화를 강렬한 색채와 반복적인 패턴으로 시각화해 도시 경관의 역동성을 표현한 ‘도시계획백서’ 연작 등 13점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1969년 동료 12명과 창설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던 1969~1975년의 작품들이 3부를 구성한다. 평면 위에 철사를 구부려 박거나 가시철망으로 캔버스를 감싸는 등 회화에 입체성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실험적 시도는 이 시기 정점을 향한다. 여러 개의 거울과 두개골 및 골반 엑스레이 필름을 재료로 제작한 전위적 설치 작업인 ‘작품(1970)’이 55년 만에 재현돼 관객을 찾는 등 흥미로운 요소가 가득하다. 4부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대표하는 ‘접합’ 연작의 초기 작품 6점이 전개된다. 작가는 1974년 ‘입체 실험에서 얻은 효과를 평면에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토대로 ‘접합’을 착안, 올이 성긴 마대자루를 캔버스로 활용해 뒷면에 물감을 듬뿍 바른 후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배압법’을 고안했다. 마대자루 표면을 투과해 흘러나온 물감으로 입체적인 텍스처와 깊이를 형성하는 이 작업 방식은 회화가 가진 매체의 한계를 넘어 작가의 신체적 행위와 물질성까지 결합한 결과물로 드러나며 특별한 감동을 준다.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예술감독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하종현의 실험 정신이 초기 작업 전반을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라며 “하종현이 남긴 시간의 흔적, 재료와 물성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마주하며 그의 작품 속에 담긴 시대적 메시지와 깊이 있는 탐구를 새롭게 발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4월 2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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