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34조 원의 대규모 기금을 조성해 배터리·바이오 등 첨단 산업을 지원한다. 최근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현상과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전기차 의무화 폐지 선언 등으로 실적 부진을 겪고 있는 배터리 업계의 자금 조달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 겸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에서 “배터리·바이오 등 첨단 산업과 기술을 지원하는 가칭 ‘첨단전략산업기금’을 산업은행에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최 권한대행은 “이 기금은 반도체 금융 지원 프로그램의 2배 이상 규모로 조성해 저리 대출과 지분 투자 등 다양한 지원 방식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구체적인 기금 신설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 관련 법률 개정안을 3월 국회와 협의하겠다”고 설명했다. 정확한 규모를 밝히지 않았지만 이미 가동 중인 반도체 금융 지원 프로그램의 규모가 17조 원인 점을 고려하면 최소 34조 원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작년 배터리 3사 영업이익 폭락…소재기업까지 덩달아 실적 악화
정부가 조성 계획을 밝힌 34조 원 규모의 ‘첨단전략산업기금’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과 트럼프발 관세 폭탄으로 휘청이고 있는 국내 배터리 업계에 ‘가뭄의 단비’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배터리 업계는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으로 가장 큰 타격이 예상되지만 그동안 정부 차원의 금융 지원이 미진했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정부가 이번 기금 지원 대상으로 배터리를 콕 집어 언급한 것도 이런 점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 불황에도 자동차와 함께 국내 산업을 이끌었던 배터리 산업은 최근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때 영업이익이 조(兆) 단위에 달했던 배터리 3사는 전 세계적인 전기차 수요 둔화에 지난해 영업이익이 수천억 원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국내 1위 배터리 제조사인 LG에너지솔루션(373220)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5754억 원으로 전년(2조 1632억 원) 대비 9분의 1 수준으로 줄었고 삼성SDI(006400)는 3633억 원으로 같은 기간 76.5% 급감했다. 아직 지난해 4분기 실적을 발표하지 않은 SK온은 연간 영업손실이 1조 1000억 원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적 한파는 배터리 3사에 부품을 공급하는 소재사들에도 몰아치고 있다.에코프로비엠(247540)은 2023년 2952억 원 흑자에서 지난해 416억 원 적자가 예상된다. 2023년 2조 5292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던 LG화학도 지난해 영업이익이 9168억 원으로 64%나 급감했다.
전기차 의무화 폐지 선언한 트럼프…IRA 보조금 폐지 가능성도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전기차에 비우호적인 트럼프 2기 행정부를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월 20일 취임사에서 “전기차 의무화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가 2030년까지 신차 판매의 50%를 전기차로 전환하기로 한 행정명령을 폐기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연기관차의 판매를 제한하는 주(州) 정부 배출 규제를 적절한 경우 없애야 한다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이 같은 정책 변화는 배터리 업체에 더 치명적이다. 완성차 업체는 내연기관차와 하이브리드 중심으로 판매 정책을 가져갈 수 있지만 배터리 업체는 완성차에 대한 공급 의존도가 높다.
트럼프 행정부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배터리 업계에 주는 생산투자세액공제(AMPC)를 줄이거나 폐지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캐나다에 25% 관세 부과를 본격화할 경우 캐나다에 투자한 배터리 회사들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캐즘·관세 이중고' 배터리 한숨 돌려…시중은행도 공동 출자
이번 기금을 저리의 대출 또는 지분 투자 형식으로 지원할 경우 배터리 기업들의 자금 운용에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금융 당국은 시중은행이 참여하는 별도의 펀드를 조성해 간접투자하는 방식도 검토하고 있다. 펀드는 산업은행이 일정 규모의 자금을 펀드에 먼저 출자해 마중물 역할을 하면 시중은행이 뒤따라 돈을 투입하는 구조로 설계된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펀드에 시중은행이 참여하면 산은이 독자적으로 투자할 때보다 더 많은 자금을 동원할 수 있다”고 전했다.
당국이 펀드 방식의 투자를 검토하는 것은 은행의 투자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은행은 기업 등에 직접 투자할 경우 투자금의 4배를 장부상 위험가중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정책금융기관인 산은이 펀드에 일정 규모의 자금을 대는 경우 실제 투자 금액만큼만 위험가중자산을 인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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