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면세 업계가 고사 위기에 처한 것과 달리 일본 면세점은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며 최대 호황을 맞고 있다. 명품 판매 및 중국인 보따리상(다이궁)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 면세점과 달리 일본에서만 살 수 있는 특화 상품을 갖춘 데다 엔저까지 더해지며 한국은 물론 중국·미국 등 글로벌 관광객을 빨아들이고 있다.
17일 일본정부관광국에 따르면 2024년 12월 일본을 찾은 해외 관광객은 월간 기준 348만 9800명을 기록했다. 해당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64년 이후 월별 방일 외래 관광객 수가 340만 명을 돌파한 것은 처음이다. 이 중 한국 관광객은 주요 23개국 중 가장 많은 86만 7400명이었다.
연간 기준으로도 지난해 일본을 찾은 관광객은 3686만 9900명으로 코로나19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한국인 관광객은 전년 대비 26.7% 증가한 881만 7800명으로 국가별 1위를 차지했다.
특히 한국 관광객이 면세품을 구매한 비율은 2023년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일본을 찾은 한국인 2명 중 1명 이상이 현지에서 면세 쇼핑을 한 셈이다. 2023년 기준 국적별 일본 면세점 이용자 수를 보면 한국이 357만 6669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이어 대만 287만 239명, 중국 152만 2900명, 홍콩 134만 8987명, 미국 35만 5986명 등의 순이다.
반면 국내 면세 업계는 외국인 관광객 수는 회복되고 있지만 1인당 구매 금액은 제자리걸음이다. 면세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기준 면세점을 방문한 외국인 수는 857만 명으로 1년 만에 59.4% 늘었지만 이들의 매출은 10조 1010억 원으로 0.8% 증가하는 데 그쳤다. 롯데·신라·신세계·현대 등 국내 주요 면세점들의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 적자는 1355억 원에 달한다.
롯데면세점이 올해부터 다이궁과의 거래를 중단하고 신세계면세점은 이달 24일 부산 센텀시티점을 12년 만에 폐점하는 등 비용 감축에 나서고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환율에 물건도 없다…텅빈 명품관
“한국 면세점은 물건 가짓수도 없고 너무 비싸네요. 둘러만 보고 나왔어요.”
17일 서울 중구 명동의 한 시내 면세점에서 만난 미국인 A(51) 씨는 “똑같은 청바지가 뉴욕에서 80달러인데 한국에서는 120달러나 한다”며 “명품 매장도 종류가 많지 않고 너무 비싸서 그냥 나왔다”고 말했다. 이 면세점의 샤넬·구찌·에르메스 등 매장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거나 대기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국내 화장품 브랜드 헤스킨 매장에는 중국인 10여 명이 파운데이션과 페이스 크림을 가득 담은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헤스킨은 왕훙(중국 인플루언서)이 추천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다. 국내 패션 브랜드인 MLB·휠라 매장에도 중국인 관광객이 북적댔다.
명품 판매 및 중국인 보따리상(다이궁)에만 의존하던 국내 면세 업계가 존폐 위기에 몰린 가운데 일본 면세점처럼 현지에서만 살 수 있는 특화 상품을 적극 발굴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국내 면세점들은 다이궁에 팔기 쉬운 대기업 계열 화장품이나 명품에 의존하면서 새로운 브랜드와 기획 상품 발굴에 소홀했다는 게 유통 업계의 중론이다.
일본정부관광국에 따르면 2023년 한국 관광객이 일본 면세점에서 산 물품 1위는 제과류(31.7%)였다. 2위 상비 의약품(20.9%), 3위 패션 잡화(16.9%) 순으로 나타났다. 값비싼 명품이나 시계·주얼리가 아닌 일본에서만 살 수 있는 상품이 환율 혜택으로 국내보다 가성비 있다고 여겨지면서 한국인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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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 업계 관계자는 “국내 면세 업계가 명품 브랜드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면세점에서 명품을 구매하는 고객은 고액 자산가에 비해 가격에 민감하다”면서 “최근에는 엔저 효과를 보기 위해 국내 매장에서 구경한 후 일본에서 구매하는 고객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국내 면세 업계도 다이궁 의존도를 낮추는 한편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K뷰티·K푸드 등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상품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신세계면세점에 따르면 국내 상품 매출 1위는 정관장과 아이코스로 과거와 비슷하지만 새롭게 뜨는 브랜드로 식품 중에서는 ‘딸기가 통째로 다크&화이트 초콜릿’, 주류는 ‘화요블랙53’가 순위에 올랐다.
반면 면세점에서 살 수 있는 명품 향수나 핸드크림 등 일명 ‘스몰 럭셔리’에 대한 수요는 카카오톡 선물하기 등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명품 업계 관계자는 “명품 브랜드의 글로벌 본사조차 젊은 고객을 확대할 수 있는 카카오톡 선물하기에 입점하는 것에 관심이 높다”고 귀띔했다. 지난해 카카오톡 선물하기에서 위시리스트 3위 제품은 디올의 히트 상품인 ‘립글로우’였다.
면세점은 직매입 형태로 상품을 확보하는데 코로나19 이후 규모의 경제가 줄면서 재고관리 등 비용만 늘어나는 사업구조인 점도 실적 악화의 요인이 되고 있다. 면세점을 계열사로 둔 신세계백화점은 부산 센텀시티의 면세점을 뺀 자리에 스포츠 등 백화점 매장을 들이기로 했다. 백화점은 재고 부담이 적은 위·수탁 거래가 대다수여서 백화점을 통해 해외 관광객을 공략할 유인이 높은 것이다.
중국 20분의 1수준 면세한도 높이고, 입국장 인도장 설치로 고객 잡아야
면세점 업계에서는 현재의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면세 한도를 올리고 입국장 인도장을 확대하는 등의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간 면세 업계의 ‘큰손’이었던 중국인의 빈자리를 내국인 여행객으로 채우기 위해서다. 롯데면세점의 경우 2019년 중국인 고객의 비중이 73.2%에 달했지만 2024년에는 60.2%로 줄었으나 여전히 중국 고객 의존도가 높다.
국내 여행자의 입국 면세 한도가 800달러(약 116만 원)로 일본(20만 엔, 약 186만 원), 중국 하이난(10만 위안, 약 1982만 원)에 비해 낮은 것 역시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오른 데다 국민소득, 주변국의 면세 한도 등을 고려해 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구입한 면세품을 공항에 맡기고 입국할 때 받는 ‘입국장 인도장’을 도입하는 것 또한 시내 면세점들의 숙원 사업이다. 정부는 2023년 처음으로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 입국장 인도장을 구축해 올해까지 시범 운영한 뒤 효과를 따져볼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입국장 인도장이 주요 거점에 도입되면 면세점이 내국인에게 면세품 판매를 더 유도할 수 있어 경영 안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해왔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존에 중국인의 명품 소비에 의존했던 데서 벗어나 공간 디자인도 혁신하고 체험 요소를 강화하는 등 원점에서 면세 업계가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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