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회장 허창수·사진)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당선 직후 국내 경제단체 중 가장 빨리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정책 제안서를 낸 것으로 확인됐다. 경제단체들이 맏형 자리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전경련이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경영자총협회보다 더 앞서나간 셈이다. 미국·일본 재계와의 네트워크 구축에도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철저히 ‘패싱’ 당하며 추락했던 위상을 본격적으로 회복하려는 게 아니냐는 진단이 나온다.
30일 재계에 따르면 전경련은 대선 직후인 이달 중순께 인수위에 노동·규제·세제 개혁 방안 등을 담은 정책 제안서를 비공개로 제출했다. 대선 직후 인수위 구성 단계부터 준비된 목소리를 냈다는 의미다. 대한상의와 경총이 지난 25일에야 나란히 정책제안서를 낸 점을 감안하면 전경련의 움직임은 한참 빨랐다는 평가다. 윤 당선인은 전경련의 정책 제안만 받은 상태에서 21일 경제 6단체장과 도시락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정책 제안서의 핵심 내용은 중대재해처벌법 보완, 과잉 규제 개선 등으로 알려졌다. 허창수 회장(GS(078930)그룹 명예회장) 역시 윤 당선인과 만난 자리에서 “기업인들의 창의와 혁신 DNA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과잉 규제 개선이 필요하다”며 “노사간 힘 균형과 산업 현장의 기준 확립돼 기업이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두고도 “안전이 물론 중요하지만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법은 글로벌 기준에 맞춰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강점을 보였던 글로벌 재계와의 관계 구축에도 다시 시동을 걸었다. 글로벌 공급망, 원자재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새 정부 이후 국제 가교 역할까지 맡겠다는 복안이다.
실제로 전경련은 문재인 정부 이후 한일관계 경색으로 2019년부터 중단됐던 한일재계회의를 오는 7월 재개하기로 했다. 미국과 관련해서는 지난해 11월 한미 간 경제협력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한미재계회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달 15일에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발효 10주년 기념행사를 열어 협상 당사자들을 치하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민간 경제 협력부터 물꼬를 틀면 한일관계 개선에 기여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경련이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잰걸음을 보이는 것은 무너진 단체 위상을 바로세우고 재계 맏형 역할을 재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된다. 대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이 단체의 입지는 국정농단 사태 연루 의혹으로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삼성, SK(034730), 현대차(005380), LG(003550) 등 4대 그룹이 잇따라 탈퇴했고 수입은 반토막 났다. 200명에 달했던 직원 수는 80명까지 줄어들었다. 문재인 정부는 전경련이 아닌 대한상의를 기업과의 소통 창구로 활용했다.
전경련은 다만 국민 여론과 정계 분위기를 고려해 아직까지는 신중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상의, 경총과 달리 정책 제안서를 인수위에 비공개로 낸 것도 이 같은 이유로 풀이된다. 윤 당선인 회동 때도 당선인 양 옆에는 허 회장이 아닌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SK그룹 회장)과 손경식 경총 회장(CJ(001040)그룹 회장)이 앉았다.
한편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이날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할 경우 매년 1조8000억원의 관광 수입이 발생하고 국내총생산(GDP)도 최대 3조3000억원 더 증가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윤 당선인에게 힘을 실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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