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20대 젊은 쇼핑몰 사장들은 주말에 일 안 해요. 동대문도 바뀌어야 합니다.” 동대문시장에서 17년째 의류 도매업을 운영하고 있는 박 모(53) 씨가 “온라인 주문이 일상화되고 젊은 층이 동대문으로 유입되면서 ‘워라밸’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최대 의류 도매시장인 동대문시장이 60년(1962년 평화시장 개장 기준) 만에 주 5일제를 도입한다. 판매할 상품들을 미리 창고에 입고시키면 그만인 온라인 주문 플랫폼이 활성화되면서 도매상들이 주말까지 문을 열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패션 쇼핑몰을 창업하는 20~30대 ‘젊은 사장님’들이 많아진 것도 동대문시장의 패러다임 변화에 불을 지폈다.
22일 패션업계에 따르면 서울 동대문 패션 전문 도매 상가 디오트와 청평화시장은 다음 달 1일부터, 테크노상가는 오는 25일부터 주 5일제를 시행한다. 앞으로 이들 도매 상가들은 월~금요일 0시부터 정오까지 문을 열고, 금요일 정오부터 일요일 밤 11시 50분까지 문을 닫는다. 기존에는 대부분 금요일 밤을 포함해 주 6일제로 운영했다. 패션 업계 관계자는 “디오트나 청평화시장은 동대문 도매 상가들 사이에서도 상징적인 도매 상가”라며 “두 상가에 입점한 도매상이 3000여 개에 달하는 만큼 이번 주 5일제 도입이 전체 도매시장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5년부터 동대문 패션 도매 상가들은 주 5일제 도입을 지속해서 추진해왔지만 상인들 간 의견이 쉽게 모이지 않아 번번이 무산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디오트상가운영위원회는 “상인들의 요구로 사전 설문 조사를 시행한 결과 찬성 89.7%로 주 5일제를 도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청평화시장도 찬성률 90.3%를 기록했다.
도매 상가들이 주 5일제 도입에 적극적으로 태도가 바뀐 이유는 이들의 주요 고객인 소매상들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 상품들을 판매하던 소매상들은 그날 팔아야 할 제품을 매장 오픈에 앞서 전날 밤 도매시장에서 실시간으로 구매해와야 했다. 특히 주말에 판매량이 많기 때문에 금요일 밤 동대문 도매시장 방문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소매상들이 온라인에서 사업을 전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온라인 쇼핑몰의 경우 필요한 물량을 미리 창고에 확보해두기만 하면 주말에 주문이 발생해도 상품 발송에 문제가 없다. 또 주문이 24시간 일주일 내내 발생하더라도 쇼핑몰에서의 상품 발송은 주로 주중에 이뤄지기 때문에 사업자들이 굳이 주말 밤에 동대문까지 가서 상품을 사입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여기에 브랜디나 신상마켓 등 주요 온라인 패션 플랫폼에서는 쇼핑몰 사업자들에게 실시간 판매 현황이나 구매 데이터 등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쇼핑몰 사업자들이 다음 날 수요를 예측하기도 간편해졌다. 또 이들이 제공하는 풀필먼트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상품 사입 자체를 플랫폼에서 대행해주기 때문에 도매 상가의 운영 시간과 상관없이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 변재정 테크노상가 운영회장은 “온라인 쇼핑몰이 (주요 소매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주말과 밤에 나오는 소매상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 금요일 밤 시간에 도매 상가가 운영하지 않더라도 매출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20~30대 젊은 층이 동대문 패션 시장에 유입된 것도 주 5일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통계청의 ‘소상공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20대 이하가 대표인 업체 수는 18만 2000여 개로 전년 대비 163.6% 증가했다. 업종별로는 도·소매업(2.7%)이 숙박·음식점업과 제조업에 이어 신장률 3위를 기록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패션 쇼핑몰 창업 문턱이 낮아지면서 젊은 사장님들이 늘었고 동대문시장의 ‘큰손’이 됐다는 이야기다.
주 5일제 도입으로 인력난에 시달리던 도매상들의 고민도 줄 것으로 보인다. 낮에 쉬고 밤에 일하는 동대문시장 특성상 워라밸을 중시하는 젊은 직원들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부분의 동대문시장 사업주들은 직원에게 월급과 별도로 판매 금액의 20%를 인센티브로 지급하고 있다. 한 사업주는 “동대문시장은 대표적인 3D 업종이라는 인식이 강해 직원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며 “주 5일제로 인력난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 밖에 패션업계는 온라인 플랫폼의 성장으로 주 5일제 도입뿐만 아니라 주간 운영으로도 변화가 확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4시간 주문이 발생하는 온라인 플랫폼의 특성상 쇼핑몰 사업자들이 굳이 밤에 상품을 사입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 apM 3사(apM, apM Luxe, apM PLACE)는 상인들과 주간 영업 전환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방침이다. 기존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까지 하던 운영 시간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변경하는 것이 골자다. 이달 28일부터 영업시간을 변경하기로 했으나 코로나19 확산세로 잠시 보류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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