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중국 기술 업체들이 원하는 것은 한국의 시스템입니다. 그들의 손발이 아닌 두뇌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중국 디스플레이 B 업체에서 근무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대기업 연구원 A 씨는 중국 디스플레이 회사들의 국내 인력 채용 전략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서울경제는 국내 디스플레이 대기업을 거쳐 중국 B 업체에서 지난 2019년까지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A 씨를 단독으로 만나 중국 업체들이 한국 디스플레이 고급 연구 인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이유와 배경에 대해 상세하게 들었다.
2013년 국내 디스플레이 대기업에서 일하던 A 씨는 한 헤드헌팅 업체의 제안을 받았다. 중국 디스플레이 회사에서 5.5세대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을 꾸리기 위한 공정 전문가가 필요한데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A 씨는 “지금도 주로 글로벌 채용 사이트나 헤드헌팅 업체들을 이용해 국내 인력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회사 내에서 거취를 고민했던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중국 업체에서 ‘고급 전문가’라는 직급으로 일을 시작했다. 중국 업체가 그에게 맡긴 주요 업무는 문제 해결 능력이었다. 디스플레이 제조 공정 중 발생한 각종 오류와 불량 이슈를 잡아내는 역할이었다.
A 씨는 “삼성이나 LG 등 대기업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문제를 시스템을 통해 해결하는 방식과 문화에 익숙하다”며 “중국 업체들은 특정 기술을 원하기보다는 이러한 시스템과 문제 해결 능력, 노하우를 원하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A 씨는 국내 언론에서 보도됐던 중국 업체의 파격적 연봉과 대우는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그는 국내 대기업에서 받던 급여에서 1.5배 정도 높은 수준의 연봉을 받았지만 퇴직금과 각종 보험 혜택이 없어 실제 수령하는 금액은 거의 비슷하다고 밝혔다.
또 ‘필요한 기술을 얻고 나면 가차 없이 해고한다’는 업계의 소문도 현지에서 느낀 분위기와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견해다. A 씨는 “중국 사람들도 국적을 불문하고 사업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인력은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다만 현지에서 겪는 현실적인 문제는 직급에 대한 스트레스와 문화 차이다. A 씨는 한국 인력들이 중국 회사에서 ‘관리자’로서 살아남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구조라고 전했다. 콧대 높은 중국 엘리트 연구 인력과의 잦은 불통과 갈등 때문이다. 장기 계약에 성공하더라도 언어와 생활 방식 문제로 귀국을 고려하는 인력도 많다는 의견이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오더라도 미래는 더욱 불투명하다. A 씨는 “40대에 중국으로 건너간 사람이 각종 문제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더라도 사회적인 인식과 낙인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중에도 중국 업체의 국내 인력 채용은 지속되는 추세다. 그는 최근 중국 업체들이 국내 인력 영입 전략을 새롭게 수립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업계는 주로 핵심 기술 엔지니어 유출과 공정 기술 모방을 우려하지만 오히려 중국 업체들은 국내 기업에서 상품 기획과 설비투자, 기술 로드맵 등 회사 장기 비전을 수립하는 두뇌와 시스템을 흡수하고 싶어한다는 주장이다. 국내 업체 기술을 그대로 베끼는 ‘패스트 팔로어’ 단계를 넘어 더욱 앞선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한 단계 앞선 인력 확보 전략을 꾀하고 있는 셈이다.
A 씨는 “최근 중국 업체들이 맥킨지 등 글로벌 컨설팅 회사를 통해 삼성과 LG의 전략과 비전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헤드헌터 업체들에도 국내 기술 기획 인력을 영입을 요구하고 있다”며 “반면에 국내에서는 이 인력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해 이들의 유출을 막을 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그는 미래 디스플레이 기술 보호를 위한 소재·부품·장비 내재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A 씨는 “해외 업체와의 협력보다 국내 장비 회사와 인력을 활용한 끈끈한 내재화 작업으로 중국 업체의 공정 베끼기나 장비 개조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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