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지난 2014년 정부 내 ‘그레이존 해소제도’를 도입했다. 사업자가 사업계획에 대해 규제가 적용되는지 여부를 소관부처 장관에게 문의하면 해당 부처가 규제담당부처 장관에게 1개월 안에 직접 확인해주는 제도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 해당 제도 신청 건수는 총 111건, 그 중 건강관리서비스 관련 신청만 약 20건이었다. 일본 정부는 같은 해 ‘건강관리서비스 분야 신사업활동 가이드라인’도 제정했다. 고령화 1위 국가인 일본은 2011년에도 건강관리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의료 민간회사가 760곳에 달했는데 이후 헬스케어 시장의 성장세는 더 빨라졌다. 일본·미국·영국 등이 주도하는 세계 헬스케어 시장 규모는 2015년 790억달러에서 2020년 2,060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우리나라는 이 흐름에서 소외돼있다. 가장 기본적인 의료행위의 기준마저 모호하기 때문이다. 현행 의료법은 의료인이 아니면 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지만 ‘의료행위’의 뜻에 대해서는 “의료인이 하는 의료·조산·간호 등 의료기술의 시행”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실제 의료행위의 범위는 판례나 정부 당국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복지부가 공개한 유권해석은 2012년 ‘의료법 민원·질의회신 사례집’이 마지막이다.
이 사례집만 보면 사실상 민간의 건강관리서비스는 모두 ‘불법 딱지’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복지부는 건강기능식품 판매점이 소비자의 손끝 혈당, 혈압, 체지방을 측정하거나 영양사가 식단 상담을 하면서 지방·체온 등을 측정하는 행위도 모두 ‘의료행위’로서 의료법 저촉 소지가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면 스마트폰 앱의 인공지능(AI) 채팅 서비스로 간단한 운동 처방을 해주거나 사용자가 스마트 기기로 혈압을 측정하는 서비스도 불법이다. 실제 컨설팅 전문기관 KPMG에 따르면 세계 100대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가운데 75%는 국내에서 사업을 할 수 없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지난해 2월 “의료행위 범위를 명확히 해 헬스케어 제품·서비스 출시를 활성화하겠다”며 민관합동 법령 해석팀을 통해 ‘원스톱 유권해석’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해석팀은 기존 계획보다 두 달 늦게 출범한 뒤 지금까지 아무런 해석을 내놓지 못했다. 신속한 해석을 표방했지만 복지부 관계자는 “의료계·법조계·시민단체 등 이해관계자가 워낙 많아 논의에 시간이 걸린다”고만 했다. 위원회 구성과 운영방침, 회의 일정 등이 모두 비공개여서 신생 스타트업은 이 해석팀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결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혁신성장 대책의 일환으로 다시 ‘비의료 건강관리 매뉴얼’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성과 없이 올해 2월 똑같은 내용을 ‘민간일자리 창출 지원방안’에 다시 담았다. 그나마도 3월로 발표 시점을 연기한데다 ‘맹탕’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는 “선제적 유권해석 성격의 ‘가이드라인’이라기보다는 ‘사례집’ 형식으로 내놓을 예정”이라면서 “의료법 개정이 없는 한 유권해석을 전향적으로 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러는 사이 부처 간 엇박자와 이익단체의 반발에 겨우 풀렸던 규제마저 다시 묶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앞서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암·치매 등 질병 관련 유전자 검사도 병원을 거치지 않는 소비자 의뢰(DTC)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특례를 허가했지만 곧바로 복지부 제동에 걸렸다. 복지부는 “규제 샌드박스 특례는 연구 목적”이라며 “향후 상업화를 위해서는 74개 이상의 필수조건을 적용한 복지부 인증을 다시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섰던 체외진단기기 규제완화 법도 시민단체의 거센 반발에 국회 통과가 불확실해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규제를 해소하는 체계도 중요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며 “지금은 정부가 각종 조직만 겹겹이 만들면서 시간을 끄는 모양새”라고 꼬집었다.
/세종=빈난새기자 우영탁기자 binthe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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