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 IT기술과 미디어 산업사(史)를 논할 때 ETRI를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1976년 12월 5일 한국과학기술원(KIST) 부설로 설립된 이래 수천명의 연구진이 이곳을 거쳐 학계와 관계, 업계로 나간 뒤 이곳을 ‘친정’으로 여기며 곳곳에 포진돼 있다. 대전시 유성구 대덕연구단지 속에 위치한 ETRI에 근무하는 현재 인력만 1,910명. 임원을 포함해 행정직은 불과 184명, 나머지 90%이상인 1,726명이 연구직으로 기술개발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ETRI는 얼마전 3대 인명사전의 하나인 ‘마르퀴스 후즈후’ 2006~2007년 판에 연구원 23명을 한꺼번에 등재시키면서 겹경사를 맞았다. 한국이 통신강국, 반도체 강국, 이동통신 강국으로 걸어왔던 역사의 첫 페이지에는 모두 ETRI라는 단어가 자리를 매김한다. 세계 10번째로 실현했던 전전자교환기(TDX)의 국산화나 4메가 D램ㆍ16메가 D램 등 반도체 신화창조나, 세계에서 처음으로 상용화에 성공한 CDMA(부호분할다중접속)방식 이동통신도 모두 이 조직이 했다. 참여정부 들어서는 휴대인터넷(WiBro)과 지상파DMB를 가시화해냈다. 국산 세계최고 기술들이 ETRI연구원들이 심은 씨앗에서 발아한 뒤 묘목형태로 민간에 분양되는 형태를 밟아왔던 셈이다. 수장(首長) 임주환 원장(57)은 바로 국내에서 미래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는 몇 않되는 인물로 꼽힌다. 그는 미래의 모습을 “스펀지처럼 IT가 곳곳에 스며들어가 있어 학습할 필요도 없이 말(언어)로 가정과 사무실의 각종기기, 자동차를 조작하고 제어하는 생활 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정체단계에 들어간 IT산업의 활로로 “비(非) IT분야의 IT화”를 제시했다. “IT는 산업사회 초창기 때의 동력 혹은 증기기관과 같은 거예요. IT자체가 성장의 정점에 서 있다는 얘기는 당시 증기기관 산업의 정체와 같은 맥락이지요. 증기기관들이 각종 산업에 접목돼가면서 산업화의 대폭발을 일으켰듯이 이제는 IT가 비(非) IT분야의 촉매제가 될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서 대한민국의 성장엔진들이 나와야 됩니다.” 임원장은 이를 “IT산업의 ‘수직적 상승’에서 ‘수평적 상승’으로의 전환”이라고 묘사했다. “자동차, 의료, 국방에 IT기술이 속속 접목돼 들어갈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임원장을 주축으로 ETRI가 최근 역점을 쏟고 있는 한 분야가 바로 컴퓨터그래픽(CG)을 접목한 미디어산업이다. “헐리우드가 제작한 ‘킹콩’의 경우 전체 제작비의 40%정도가 컴퓨터그래픽 비용이고, 작년 헐리우드 수익률 상위 10권내 영화중 8개 영화가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이 접목돼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고 임원장은 말했다. 영화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게임, 방송, 광고 등에서 컴퓨터그래픽은 맹활약하게 될 것이라는게 그의 진단이다. 임원장은 “총량적으로 ETRI의 컴퓨터그래픽 기술은 아직 헐리우드에 비해 2, 3년 뒤지는 건 사실이지만 가장 기술적 난이도가 높다는 디지털액터(컴퓨터 가상 연기자)기술은 세계 최고권으로 헐리우드에 맞먹는 수준까지 왔다”고 자신했다. 임원장은 “영화 ‘괴물’을 외국회사에 내준게 가장 아쉽다”며 “다만 ‘태극기휘날리며’, ‘한반도’ 등의 컴퓨터그래픽은 ETRI가 했고 로열티도 꽤 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제2의 한류를 만드는데 ETRI가 앞으로 큰 일을 해낼 것”이라며 “이게 앞으로 한국을 먹여살릴 또하나의 소득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임원장은 “좋은 기술은 결국 사람의 몫인데 개인적인 경험상 연구원들은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풍토에서 흥을 내고 좋은 결과를 내는 것 같다”며 불쑥 2003년 11월 21로 날짜가 찍힌 취임사를 내밀었다. “임직원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취임사중 “‘훌륭한 일터, 평생을 바치고 싶은 직장’은 ‘규모가 큰 기관’ 혹은 ‘급여만 많이 주는 직장’이 아니라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좋은 일터’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ETRI가 지난 3년간 노사문제 한 건없이 운영돼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대목인 듯 했다. “대화가 유일한 비결이죠. 재임중 원장문을 활짝 열어 제쳐놨어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합리적인 얘기라면 들어줬습니다.” 여기에 임원장 자신이 78년 ETRI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17년간 재직한 정통 ETRI맨이라는 점도 작용해 ETRI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점도 작용한 듯 했다. 임원장은 ETRI의 경쟁자를 묻자 “ETRI는 ‘새 기술’, 즉 뉴 테크놀로지로 잡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코카콜라가 자신의 경쟁자를 펩시콜라가 아닌 ‘물’로 잡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새 기술은 ETRI가 도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말로 ETRI의 역량에 대한 자신감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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