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9일 제주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재무장관 회의. 미국 대표로 참석한 로버트 키미트 재무부 부장관은 “미국은 (한국의) 서비스시장 개방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스크린쿼터 폐지 등 개방의 속도를 더 높여달라는 사실상의 간접적 압력이다. 이 같은 미국의 계속되는 압력과 영화인들의 반발로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대외 통상협상에 암초가 잇따라 등장하고 있어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9월 통과가 유력시되던 쌀 협상 비준안이 장기 표류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고 여기에 학교 급식 우리 농산물 사용 의무화를 담은 조례가 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은 상태다. 올 12월 홍콩에서 세계무역기구(WTO) 각료 회의가 예정된 가운데 영화(스크린쿼터), 학교 급식, 쌀 등이 대외 협상의 3대 암초로 부상하면서 국가신인도 하락은 물론 자칫 국제적 분쟁마저 불러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쌀 협상 비준 동의, 장기 표류 가능성 높아=한덕수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13일 정례 브리핑에서 쌀 비준 문제에 대해 상당 시간을 들여 위기감을 표출했다. 그는 “9월 중 국회에서 처리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올해 이행해야 할 의무수입물량(MMA) 쌀 수입에 차질이 우려된다”며 “국제적 분쟁과 신뢰도 하락이 불가피하고 비준 동의안이 부결되면 국내 쌀 산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부총리의 지적처럼 협상 비준안은 현재 농민과 야당 등의 반발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상정조차 못하고 있다. 당정은 추석 이후 적절한 시기에 비준안을 상정한다는 계획이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 재보선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비준안 처리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일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비준안 처리가 답보상태를 보이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회원국과의 협상에서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비준처리 지연 등에 따른 상대국 반발도 무마해야 되는 등 정부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또 다시 불거지는 스크린쿼터=지난달 31일 한 부총리는 영화인 대책위와 간담회에서 스크린쿼터 대체 방안에 대해 공동으로 검토한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그러나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영화인들이 발끈했다. 스크린쿼터 유지를 주장하는 영화인들은 대체 방안 검토가 사실상의 영화의무상영일수 폐지 혹은 축소라며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공동으로 논의하기도 전에 암초에 부딪힌 셈이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미국은 여전히 스크린쿼터 완전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한미 FTA 협상은 예비 연구를 다 마친 상태로 조만간 본협상을 앞두고 있다. 한 부총리는 이날 브리핑에서 “스크린쿼터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제도로 영화발전 초기에 국산영화에 대한 시장을 확보, 국산영화 발전에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면서도 “국제적 상황이나 통상관계ㆍ기술발전 등을 고려했을 때 스크린쿼터를 다소 보완하거나 대체할 방안이 있는지 계속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 “스크린쿼터 자체를 없애는 것은 힘들고 다만 영화의무상영일수를 줄일 경우 영화인들이 타격을 입지 않도록 제작지원 등 보완해줄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교 급식 조례 무효, 거세지는 반발=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학교 급식 우리 농산물 사용 의무화가 위배된다는 게 정부의 생각이다. 이에 정부는 각 도 교육청에 조례 무효 소송을 제기하도록 했고 대법원이 최근 전북도 의회 조례가 무효라는 판결을 내리게 됐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시민단체 등에서는 위헌 소송까지 낼 태세다. 아울러 미국 등 일부 국가의 경우 정부 조달 및 민간 학교 급식에서 자국 농산물 사용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협상 무능력마저 거론되고 있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GATT 협상 당시 학교 급식이 잘 발달된 미국 등 일부 선진국은 예외를 인정받았다”며 “하지만 한국은 그 당시 학교 급식이 일반화돼 있지 않아 예외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현 한국의 GATT 협정상 우리 농산물 사용 의무화는 조항에 위배돼 외교 마찰의 소지가 충분하다는 점이다. 이래저래 해답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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