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의 다음 목표는 재단의 지원을 받은 과학자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는 일입니다. 제가 52년간 한 우물만 판 것처럼 꾸준히 지원한다면 현역에서 은퇴하기 전에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이영관 한국도레이과학진흥재단 이사장은 최근 서울 강서구 도레이첨단소재 본사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배출을 위한 인력 육성을 새로운 목표로 제시했다. 노벨과학상은 단기 성과가 아닌 장기적인 연구 업적을 바탕으로 수상자를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진 만큼 기초과학 강국인 일본처럼 인재 육성을 위한 지원을 꾸준히 이어나가겠다는 게 그의 구상이다. 이 이사장은 “역사 문제를 둘러싼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는 별개로 기초과학과 관련한 장기 투자와 과학기술인을 예우하는 문화를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도레이과학진흥재단은 이 이사장이 도레이첨단소재 회장으로 재직하던 2018년 과학 발전과 차세대 인재 육성을 목표로 설립한 공익법인이다. 도레이첨단소재와 스템코 등 한국도레이 계열사가 기금을 마련해 매년 화학·재료 분야에서 선정한 연구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재단은 1960년 설립된 일본 도레이 본사의 도레이과학진흥회 모델을 벤치마킹했다. 내년이면 창립 100주년을 맞는 일본 도레이는 도레이과학진흥회를 통해 지원한 기초과학 분야 연구자 중 5명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이사장은 “도레이의 기술력뿐 아니라 기초과학 연구 지원과 인재 육성 측면도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본사를 설득해 재단을 설립했다”며 “재단의 지원을 받은 과학자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면 재단의 영예는 물론 한국 과학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경영 실적과 관계없이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지원이 중요하다”며 “도레이가 인재 육성에 60년 이상의 장기 투자를 이어온 만큼 재단을 통한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면 우리도 그 이상의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 이사장은 일본이 24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비결로 ‘장인정신’을 꼽았다. 무슨 일이든 맡으면 끝을 보고 그 분야 최고가 되려는 강한 집념이 최고의 전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인들은 끝까지 파고드는 극한·무한 정신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 전반적으로 과학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크고 이는 우수한 인재들이 기초과학 분야에 도전하게 만드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며 “일본 도레이 역시 특정 분야만 수십 년씩 연구하는 인력을 대거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화학 소재 기업으로 100년 역사를 쓸 수 있었다”고 전했다.
특히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필수인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당장의 성과보다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주고 지원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이 이사장은 강조했다. 그는 대표적인 사례로 전 세계시장의 40% 이상을 점유한 도레이그룹의 탄소섬유 개발 과정을 소개했다.
“1960년대부터 탄소섬유 개발에 나선 도레이는 ‘돈 먹는 벌레’라는 내부 비판에도 30년 이상 연구개발(R&D)을 지속하면서 1조 3000억 원을 쏟아부었고 결국 회사의 핵심 자산으로 키워냈습니다. 유니클로의 발열내의(히트텍) 역시 도레이와 함께 장기간 투자해 신소재 마이크로 아크릴 섬유를 개발하면서 가능했습니다. 반면 우리는 소부장 같은 오랜 시간과 투자로 인해 리스크가 크고 성공 확률이 낮은 곳에 투자하기를 꺼렸죠. 단기 성장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성장 분야의 변화를 내다봐야 합니다.”
이 이사장은 이공계 인재 부족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의대 쏠림’ 현상에 대해 시대적 흐름이라면서도 장기화될 경우 주요 경쟁국과의 기술 격차가 확대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의사보다 의과학자가 많이 배출되는 구조를 만드는 게 시급하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처우 개선 등을 통해 바이오·헬스 등 미래 성장 동력에 필요한 분야에서 의사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인력을 국가가 나서서 육성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이사장은 올해 4월 도레이첨단소재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샐러리맨 신화’로 불리는 그는 1973년 도레이첨단소재의 모태인 삼성그룹 계열 제일합섬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해 회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1999년 10월 일본 화학 소재 기업 일본 도레이가 지분을 출자해 도레이새한으로 사명이 변경된 뒤 초대 대표로 선임돼 총 재직 기간 52년의 절반인 26년간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지켰다. 회장직에서는 물러났지만 도레이첨단소재 상담역(고문)으로 여전히 주요 회의에 참석하는 등 회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 이사장은 직장인으로서의 장수 비결로 주인의식을 꼽았다. ‘월급쟁이’라는 말이 가장 충격적이었다는 그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내가 그 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며 “누가 시켜서, 월급을 받기 때문에 일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도레이첨단소재의 모기업이 일본 기업인 만큼 이 이사장은 한일 양국 정부·기업 간 협력 강화를 주문했다. 그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등 국제 무역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동아시아 중심의 무역 확대와 경제협력 필요성이 커졌다”며 “한일 양국은 반도체·배터리·전기차·로봇 등 미래산업에서 여전히 중요한 파트너인 만큼 미래 지향적 경제협력 관계를 만들어갔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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