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노숙인들을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하나같이 관계의 단절로 생겨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치료하는 것은 육체적인 질병보다 관계 회복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최근 에세이 ‘나는 언제라도 너의 편이다’를 펴낸 서울시립서북병원 내과 전문의 최영아 씨는 24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노숙인 등 우리 사회 취약 계층이 가장 흔하게 겪는 질병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지난 30여 년간 수많은 취약 계층 환자들과의 만남과 이별을 경험하며 ‘관계’가 얼마나 강력한 치유의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배웠다”면서 “결국 그들에 대한 치료는 고립된 삶을 변화시켜야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최 씨는 의대생 시절인 1990년대 초부터 거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의료 봉사를 이어왔다. 진료 대상은 노숙인, 독거노인, 외국인 근로자 등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웃들이었다. 전문의를 취득한 뒤에는 서울 청량리 뒷골목에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다일천사병원’을 설립해 유일한 상주 의사로 밤낮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이후 영등포 쪽방촌 ‘요셉의원’, 서울역 노숙자들을 위한 ‘다시서기의원진료소’,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안식처’라 불리던 ‘마리아수녀회 도티기념병원’으로 자리를 옮기며 가장 낮은 곳을 향한 의료 활동을 이어왔다.
최 씨가 처음 노숙인들을 접한 건 예과 2학년 때 의료 봉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는 “당시에는 온 가족이 거리에서 구걸하는 일도 흔했고, 경찰이 동행하지 않고는 노숙인을 환자로 치료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의사들도 적극적으로 치료하기를 꺼려했다.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그가 전공으로 내과를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 씨는 “노숙자들은 당장 치료가 필요한 여러 질환을 앓고 있을 것 같은데 그때만 해도 정확한 병명은 몰랐다”며 “감기약 정도를 처방해주는 의료 봉사가 과연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이 계속되던 때였다”고 기억했다.
노숙인복지법 제정 등으로 2017년 도티기념병원이 문을 닫은 뒤 옮겨온 서울시립서북병원에서 그를 찾는 환자 역시 80%가 노숙인이다. 최 씨는 “소속만 달라졌지 기존에 해왔던 일들의 연속선상에 있다”며 “청량리역·서울역에서 처음 만나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가는 환자들도 여럿이다. 그중에는 환자가 아니라 재기에 성공한 이들도 있다. 나에게는 일종의 가족과 같다”고 소개했다. 사비를 털어 노숙인들의 주거비나 보증금을 지원해온 최 씨는 “그동안 일했던 병원 중에서 가장 많은 급여를 받고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고도 했다.
이번에 출간한 에세이는 최 씨가 전문의를 취득한 2001년부터 지난 25년간 만난 노숙인들을 기록한 의료 노트의 일부다. 단순히 환자 진료 기록이 아닌 그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느껴온 단상들을 공유하기 위한 차원이다. 그는 “오랜 시간 함께한 환자들의 삶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의사와 환자, 인간 대 인간으로 맺어진 깊은 인연을 통해 질병 그 자체를 넘어 인간이 갖는 아픔과 고통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됐다”며 “환자들을 만나고 돌보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여전히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배우는 중”이라고 전했다.
2014년 노숙인 1000명의 데이터로 연구 논문 ‘질병 상태를 통해 본 한국 노숙인의 삶에 대한 고찰’을 발표한 그는 “과거에 비하면 한국은 경이로운 수준의 의료 접근성을 제공하는 나라로 성장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럼에도 노숙인들의 질병이 쉽게 치료되지 않는 것은 개인화와 인간 소외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인간관계가 단절된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노숙인들을 흔히 집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지만 실상은 인간관계가 없는 단절된 사람들”이라며 “물리적인 집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내가 머무를 수 있는 마음의 쉼터가 없는 사람들이다. 영어로 노숙인을 하우스리스(Houseless)가 아닌 홈리스(Homeless)로 표현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덧붙였다.
그는 노숙인들은 가족관계가 해체되면서 회복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극단적 예로 결핵을 꼽았다. 가난과 연관된 ‘후진국 병’이라고 불리는 결핵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최 씨는 “노숙인들은 치료하기 어려운 난치병이나 희귀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라며 “겉으로는 내과나 정신과적 질병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관계가 깨지면서 생겨난 병들이다. 따라서 이미 깨져버린 가족·혈연관계를 대체할 새로운 관계가 형성돼야만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하다”는 처방을 내놨다.
최 씨는 그동안 만난 사람들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었음을 강조한다. 한때 많이 배웠고, 돈이 많았으며, 소위 잘나가던 사람도 있었지만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견디기 어려워하면서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를 망가뜨리려는 사람들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모든 인간이 겪고 있는 죽음, 질병과의 싸움을 조금 일찍 맞이하는 게 노숙인들”이라며 “다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최 씨는 “노숙인을 비롯한 취약 계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의료적인 영역을 넘어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고 함께 돌봐야 한다”며 의료 노트에 기록된 단상을 전했다. “우리의 삶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늘 상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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