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롯데그룹이 지주회사 전환을 발표하면서 핵심 금융 계열사인 롯데손해보험과 롯데카드의 매각을 결정했다. 유통산업이 주력인 롯데그룹으로서는 롯데카드와 롯데손해보험이 유통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알짜 기업이었지만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의 분리)’ 규제에 가로막혀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통산업은 쿠팡과 네이버·카카오 등 플랫폼 기업의 거센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그룹의 역량을 총동원해도 모자란 시점에서 롯데그룹은 금융 계열사를 내다 팔 준비를 해야 했고 결국 ‘롯데 생태계’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반면 일본의 소니는 정반대다. 소니는 지난 수십 년간 은행과 보험사 등을 통해 전자·엔터테인먼트 사업과 금융을 자유롭게 결합해왔다. 소니의 제품에 보험을 제공하고 결제 시스템이나 렌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식으로 소니의 전자 사업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최근 소니는 금융 자회사들을 소니파이낸셜그룹으로 분사하기로 결정했다. 과거에는 전자 사업이 흔들려서 금융이 안정적 캐시카우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엔터테인먼트·반도체·콘텐츠 등의 주력 산업이 안정기에 들어선 만큼 금융 부문이 더 이상 같은 울타리 안에 있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소니는 필요에 의해서 금융 부문을 분리했고 롯데는 필요했지만 금융 계열사를 팔아야만 했다”며 “한국에는 금산분리가 있었고 일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1일 재계에 따르면 40년 묵은 금산분리 규제가 한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갉아먹는 족쇄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재벌의 사금고화를 막기 위해 금산분리를 도입했다지만 이제는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규제로 변질됐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금융·유통·제조가 하나의 플랫폼 안에 묶여 경쟁하는 빅블러(Big Blur) 시대에 한국 기업들이 ‘융합의 경쟁력’을 박탈당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삼성전자다. 삼성전자의 가장 큰 글로벌 경쟁자인 애플은 애플카드와 애플저축 등을 출시해 소비자들을 강력한 ‘아이폰 생태계’에 가두는 ‘록인(Lock-in)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점유율 세계 1위를 기록하면서도 이런 전략을 구사할 수 없다. 삼성카드·삼성화재 등 계열 금융사가 있지만 금산분리로 인해 금융 계열사와의 직접적인 서비스 융합이나 지분 결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대차도 마찬가지다. 도요타 등 글로벌 완성차 메이커들은 은행까지 포함한 자신들의 전속 금융사를 통해 저리로 자금을 조달, 고객에게 낮은 할부 금리를 제공한다. 실제로 도요타의 자회사인 도요타금융서비스(TFS)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은행업을 영위하면서 고객들로부터 예금을 받아 이를 자동차 할부 금융 재원으로 사용한다. 반면 현대차는 국내 금산분리 규제에 묶여 해외에서도 캐피털 등을 통해 자동차 금융을 제공해야 한다. 수신 기능이 없는 캐피털사는 은행보다 조달 금리가 높을 수밖에 없어 현대차는 구조적으로 경쟁사보다 높은 금융 비용을 떠안고 싸워야 한다.
쓸데없는 지배구조 재편으로 비용을 낭비한 경우도 있다. 한화그룹이 대표적이다. 국제회계기준인 ‘IFRS17’ 도입을 앞두고 2022년 한화그룹은 ㈜한화가 자회사인 한화건설을 흡수 합병하는 등의 지배구조 개편을 단행했다. 이는 새 회계제도가 도입될 경우 보험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는데 이때 한화생명의 자산가치가 변동돼 ㈜한화 또는 한화건설의 자산 내 비중이 50%를 초과하게 되면 강제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화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바뀌면 롯데그룹과 같이 그룹의 두 축 중 하나인 한화생명 등 금융 계열사를 매각할 수밖에 없는 만큼 한화그룹은 지주사 전환 요건이 발동하지 않도록 시간을 번 것이다.
기업가치가 1조 원이 넘는 유니콘 기업이 한국에 적은 이유도 금산분리 규제와 관련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올해 11월 기준 미국의 유니콘 기업은 738곳에 달하지만 한국은 15곳에 불과하다. 재계 관계자는 “금산분리로 국내 기업들은 금융·핀테크 투자가 어렵고 금융사들은 일반 기업 투자를 대규모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이같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금산분리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꾸준히 지적해오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쩐(錢)의 전쟁’이 시작된 만큼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제한적인 측면에서라도 규제 완화를 전향적으로 검토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신현한 연세대 교수는 “수백조 원에 달하는 투자자금을 기업이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달라는 것이 요지”라며 “한국의 경제력으로 봤을 때 대기업 집중 우려는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고 기업들이 과거와 같이 금융사의 돈을 마음대로 갖다 쓸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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