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검은 활자의 강과 같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헝가리어 소설 ‘사탄탱고’와 ‘저항의 멜랑콜리’를 영어로 옮긴 번역가는 그의 작품을 이렇게 표현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만연체 문장과 낯설고 음울한 세계는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활자 속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이 작가의 작품이 최근 국내 서점가에서 예상 밖의 판매 호조를 보이고 있다. 젊은 독자층이 가세하면서 일시적인 ‘노벨상 특수’를 넘어 ‘읽히지 않는 노벨상 수상작’의 공식을 깰지 주목된다.
14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9일 오후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 이후부터 13일 오전까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소설은 약 4500부가 판매됐다. 대표작인 ‘사탄탱고’가 3000부로 가장 많이 팔렸고 ‘저항의 멜랑콜리’도 700부가 나갔다.
판매 호조에는 20~30대 독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같은 기간 구매자 중 30대가 29.2%로 가장 많았고 20대가 21.5%로 뒤를 이었다. 전체의 절반이 넘는 50.7%가 2030세대인 셈이다. 40대(19.7%)와 50대(17.4%)보다 확연히 높은 비중이다. 이는 지난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소년이 온다’ 등의 판매 통계에서 2030 비중이 44.8%였던 것보다 약 6%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당시에는 40대(23.1%)의 구매율이 30대(28.9%)에 근접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한강 작가처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대개 판매가 저조한데 올해는 이례적”이라며 “지난해부터 이어진 2030세대의 ‘텍스트힙’ 열풍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욘 포세의 작품은 수상 직후 5일간 판매량이 크러스너호르커이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예스24 집계에서는 종이책 기준 같은 기간 구매자 중에서 40대의 비중이 31%로 가장 많았지만 전자책에서는 2030세대의 구매가 두드러졌다. 예스24 관계자는 “디지털 독서 환경에 익숙한 젊은 층은 ‘사탄탱고’를 전자책으로 즉시 찾아 읽는 경향이 높았다”며 “긴 문장과 철학적인 서사가 오히려 호기심과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젊은 독자들 사이에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이 호감도를 얻는 이유로 감각적인 표지 디자인도 꼽힌다. 안지미 알마출판사 대표는 “소설 표지의 색감과 타이포그래피를 통일감 있게 구성해 시각적 완성도를 높였다”며 “디자인이 세련되고 개성적이라 소장 욕구를 자극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부터 20~30대 독자들 사이에서 ‘텍스트힙’ 열풍이 불면서 에세이나 자기계발서를 넘어 순수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민음사 관계자는 “도서 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된 상황에서도 순수 문학은 꾸준히 선전하고 있다”며 “헤르만 헤세, 카뮈, 다자이 오사무 등 해외 고전 판매도 전년 대비 상승세”라고 말했다.
출판계는 이번 노벨상 훈풍이 반짝 인기에 그칠지, 꾸준히 지속될지 주목하고 있다. 추석 연휴로 인쇄 일정이 지연돼 아직 주문 대비 배송률이 낮아 실제 책을 읽은 독자의 수는 많지 않다. 안 대표는 “이번 주 본격적으로 배송이 시작되면 독자 반응이 더 뚜렷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출판사는 독서 문턱을 낮추기 위해 다음 달 4일 헝가리문화원에서 ‘사탄탱고’와 ‘저항의 멜랑콜리’를 번역한 노승영 번역가가 참여하는 북토크를 마련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북토크와 소설 원작 영화 ‘사탄탱고’의 상영도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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