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민당 다카이치 사나에 총재가 20일 이후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총리로 지명될 경우를 대비해 내각 인선을 본격화했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과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등 총재선거에서 맞붙었던 경쟁자들을 기용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공명당의 연립 이탈 여파로 ‘다카이치 총리 취임'을 장담할 수 없게 된 가운데 퇴진을 표명해 사실상 레임덕 상태인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정권 유지 기간이 길어지면서 경제·외교 정책 공백 우려는 날로 심화하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가 된다면…” 고이즈미 방위상·하야시 총무상
14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다카이치 총재는 총리 지명 시 고이즈미 농림상을 방위상에, 하야시 관방장관을 총무상에 기용하는 방향으로 조정에 들어갔다. 외무상에는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을 임명할 방침이다. 이들 3명은 모두 지난 4일 치러진 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며, 고이즈미는 2위, 하야시는 3위, 모테기는 5위를 차지했다.
선거에서 4위를 기록한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이미 정조회장에 기용됐다. 선거 출마자들을 대거 요직에 배치한 것은 당내 화합을 위한 ‘거당일치 인선’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 같은 인선은 다카이치 총재의 총리 지명이 이뤄질 경우에 가능한 구상이다. 중의원 의석에서 자민당은 196석으로 과반(233석)에 미달하는 상황이다. 공명당의 연정 이탈로 야권이 재편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총리 지명에서 야당 후보가 선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야당 제1당인 입헌민주당은 야당 총리 후보 단일화를 도모하고 있으며 국민민주당의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가 후보로 거론된다. 현재 입헌민주당, 일본유신회, 국민민주당 3당이 단일 후보를 내면 의석수는 총 210석으로 자민당을 앞선다.
野3당 간사장 ‘단일후보’ 회동 - 자민당 ‘운영 방침’ 간담회
입헌민주당과의 정책 차이 해소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연대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혀왔던 다마키 대표는 전날 자신의 X(옛 트위터)에 노다 요시히코 대표와의 당수회담에 응할 의향을 밝혔다. 그러면서 당수 회담에 앞서 양당 간사장이 먼저 만나 회담의 테마 등에 대해 논점을 정리하도록 하자는 입장을 전했다. 다만, 다마키 대표는 자민·공명·일본유신 등과도 주중 간사장 회담을 열도록 지시했다는 점을 밝히며 “각 당과 확실히 협의하겠다”는 신중론을 이어갔다. NHK는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 일본유신회 3당 간사장이 14일 만남을 조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궁지에 몰린 자민당은 이날 오후 당 본부에서 중·참 양원 간담회를 열어 향후 대책을 논의한다. 다카이치 총재는 이 자리에서 공명당의 연립 이탈 경위와 향후 당 운영 방침 등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다.
다카이치 “아직 총리 아니라” 이시바 “그만둘 사람이라”
이런 가운데 일본의 총리·총재 분리 상황이 장기화하며 정치 공백 및 정책 차질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다카이치 총재의 새 집행부가 지난 7일 출범했지만, 공명당의 연립 이탈로 총리 지명선거를 위한 임시국회 소집은 당초 15일에서 이달 하순으로 연기된 상황이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그간 자민당 집권 하에서는 총재 선거 직후 곧바로 국회를 소집해 신임 총리를 선출해 왔다. 이에 총리와 자민당 총재가 다른 사람인 이른바 ‘총총분리’ 기간은 통상 수일에 불과했다. 지난해 이시바 정권은 총재 선거 4일 후, 2021년 기시다 후미오 정권도 선거 5일 후 출범했다. 반면, 다카이치 총재의 경우 지난 4일 선거 후 정권 출범까지 2~3주가 걸리거나 이마저도 좌초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미 퇴진을 표명한 이시바 총리가 정권을 유지하는 기묘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정책 주도권’을 쥔 리더가 실종된 상황이다. 실제로 다카이치 총재는 고물가 대책의 조기 실시 등을 내세우며 임시국회에서 추경(보정예산안)편성과 휘발유 감세법안 통과 등을 목표로 했지만, 임시국회 소집 자체가 미뤄지고 있다. 추경은 통상 총리의 편성 지시 후 한 달 이상이 소요되는 만큼 지금 상태로는 연내 성립이 어려울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다카이치 총재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나는) 그저 총재일 뿐 총리가 아니기에 관청에 지시를 내릴 수 없다”며 “관련 대응이 지연되고 있다”고 인정했다. 이시바 총리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다. 9월 초 퇴진을 표명한 이시바 총리는 당 총재 선거에서 다카이치 총재가 선출된 시점부터 사실상 여당 내 영향력을 상실해 중요한 정책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레임덕(식물 정권)’ 상태다. 지난 10일 자민-공명 연립 붕괴 당시에도 이시바 총리는 기자단에 “지금 나는 자민당 총재가 아니기 때문에 당과 당의 이야기에 대해 언급할 입장이 아니다”라고만 말했다.
가자 평화 정상회의, G7 중 日만 정상 불참
경제 정책 추진이 사실상 멈춰선 상황에서 외교 정책 역시 정권 출범 지연의 영향을 받고 있다. 26일부터 말레이시아에서 아세안(ASEAN) 정상회의가 열리고, 27~2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다. 방일 기간에는 미·일 관세 합의 이행과 안보 협력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전망이다. 이 밖에도 31일부터 11월 1일까지는 한국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아사히는 외무성 관계자를 인용해 “외교 일정에 대해 외무성 간부가 비공식적으로 다카이치 총재와 접촉해 설명하고 있지만, 상세한 논의는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한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주도 하에 13일 이집트에서 가자지구 평화 정상회의가 열린 가운데 일본에서는 주 이집트 대사가 참석했다. 교도통신은 일본을 제외한 주요 7개국(G7)은 모두 정상이 참석했다고 보도하며 “일본 정부가 가자 부흥에 관여하고 싶은 의사를 나타내 왔지만, 불안정한 내정이 외교에 영향을 줘 요직자의 참가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참석 정상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바쁜 와중에도 와줬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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