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이 22일 “세종대왕은 법을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근 국회가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대법관 증원 등 사법개혁 입법을 논의하는 상황에서, 사법부 독립성을 잃어선 안 된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 개회사에서 “세종대왕은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고 권리를 보장하는 규범적 토대를 마련했다”며 “급변하는 시대에도 사법은 공정성과 독립성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접적인 현안 언급은 피했지만, 여권 일각의 이른바 ‘4인 회동설’ 공세 등 사법부를 둘러싼 논란과 맞닿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어 조 대법원장은 고문과 가혹한 형벌을 제한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했던 세종의 사례를 소개하며 “사법은 본질적으로 인본주의적 가치 위에 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 대법원장은 훈민정음 혜례본을 직접 인용하며 “훈민정음은 백성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는 정의의 문자이자 법치주의 정신을 구현한 제도적 장치였다”며 “세종의 법철학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 사법부가 지켜야 할 가치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정치적 압력과 기술 변화가 뒤섞인 상황 속에서 법원이 본질적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는 점을 짚으며 “정의와 공정이 살아 숨 쉬는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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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준 대법관도 이어지는 주제 발표에서 사법부 독립이 위협받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가 오고 있다”며 “사법부 독립성을 훼손하려는 유·무형의 압력이 강화되고, 사법의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늘어 법적 안정성에 대한 확신이 약화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협의보다는 권위가 주목받고 있다”며, 세종이 보여준 민본주의적 법치와 애민 정신을 지금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해 모든 백성이 법과 정의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며 “세종의 사법 철학과 정의에 대한 이상은 오늘날에도 깊이 울리고 있으며, 이번 회의가 진솔한 대화와 교류를 통해 사법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세종 국제 콘퍼런스는 2016년 이후 9년 만에 대법원이 주재하는 국제 행사로, 각국 대법원장과 대법관, 국제형사재판소 전·현직 소장 등이 참여해 법치주의와 사법 접근성 강화를 비롯해 사법독립, 인공지능(AI)이 사법체계에 미치는 영향 등 다양한 주제를 논의하는 자리다. 대법원이 국제무대에서 세종의 법철학을 공유하며 사법 독립과 법치주의 가치를 재차 강조한 건 최근 정치권의 사법개혁 드라이브와 맞물려 법원이 놓인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나온다.
한편 법원 내부의 공식 의견수렴 기구인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오는 25일 재판제도 분과위원회 주최로 ‘상고심 제도 개선’을 주제로 토론회를 연다. 이번 논의는 최근 국회 사법개혁특위가 추진 중인 대법관 수 증원안과 대법관 후보 추천 방식 개선안을 다루는 자리로, 분과위가 지난 8월부터 연구와 내부 검토를 거쳐 마련한 보고서를 기초자료로 삼는다. 보고서에는 △대법관 수를 30명으로 늘리는 방안에 대한 찬반 논거 △증원 속도와 범위에 대한 신중론 △하급심 강화와 병행 필요성 등이 제시됐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독립성과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 위원 구성에서 법원행정처장이나 국회 추천 몫을 배제하는 방안과 함께, 회의 절차 공개·녹음·속기 의무화 등 투명성 강화 방안도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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