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가 세포다. 현미경의 동그란 창 안에서 펼쳐지는 세포의 움직임에는 그저 ‘꼬물거린다’고 말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나름의 작동 원리와 엄격한 규칙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고 먼,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대상이 우주다. 망원경을 통해 가까스로 엿보는 우주의 광활함에는 해가 뜨고 별이 진다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시(詩)가 깃들어 있다.
가장 작은 세포의 미시 세계와 가장 너른 우주의 거시 세계를 관통하는 화가 이강욱의 개인전 ‘1mm의 경계’가 3월 8일부터 7월 31일까지 경북 경주시 사정동 플레이스씨(Place C)에서 열렸다. 플레이스씨는 역사와 전통미술이 강세인 경주에서 현대미술 전문 갤러리를 표방하며 2023년 개관했고, 2주년을 기념하며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 작가의 시기별 대표작 140여 점이 엄선돼 20년 남짓한 예술 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내 작업의 출발 지점이 된 세포와 우주. 엄연히 존재하지만 맨눈으로는 볼 수 없고, 상상으로부터 시작된 관념적인 것들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자연계에서 이런 식의 비슷한 풍경이 종종 발견됩니다. 세포 분열의 장면과 태양의 흑점 폭발이 비슷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같은 사례들이죠.” (2025년 5월 1일 작가와의 인터뷰 중에서)
그림의 시작은 자신에 대한 탐색이었다.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미립자를 확대해 들여다보며 작업으로 이어갔다. 나의 존재를 생물학적으로 파고들었던 초기작이다.2000년 초반 나노와 생명공학, 유전자 복제 등이 이슈가 됐던 시절이다.
이강욱은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생이던 2001년 대한민국회화대전 대상을 시작으로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 등을 휩쓸며 일찍이 두각을 보였다. 2007년 방영된 김영민·이선균 주연의 드라마 ‘하얀거탑’에 그의 작품이 등장해 주목 받으며 ‘세포그림의 인기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잘 나가던’ 그 때 안주하지 않았고, 영국 유학을 결심했다. 런던 첼시 칼리지에서 석사, 이스트 런던 유니버시티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포처럼 보이는 초기작은 실제로 나에 대한 궁금증을 생물학적으로 접근시켜 발견한 이미지였습니다. 영국 유학 중에 새로운 작업을 모색하다 고대 힌두 철학의 우파니샤드를 알게 됐어요. 큰 것, 절대 불변의 진리인 브라만과 작은 존재이며 변화무쌍한 아트만을 결국 동일한 실재이자 자아의 내면으로 보는 그 개념을 연구해 이후 내 회화에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범아일여(梵我一如). 힌두교와 불교 철학에서는 우주의 근본 원리인 브라만(Brahman·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Atman·我)이 궁극에는 하나라고 했다. 극과 극이 마침내 통하는 장면이 화폭 위에 펼쳐진다.
이강욱은 추상화가다. 그는 캔버스 바탕에 세포 이미지를 옮긴 다음 아크릴을 여러 번 칠해 밑에 깔린 이미지를 흐리게 했다. 그 위에 펜과 연필 등으로 드로잉한 후 다시 아크릴을 칠하거나 반짝이, 작은 유리구슬 등을 붙여 독자적인 공간감을 부여한다.
“처음에는 분명 (세포라는) 존재하는 대상이 있었고, 그 대상을 보고 그렸습니다. 중요한 건 대상과 (바라보는) 우리의 거리에 대한 문제입니다. 손을 그린다고 할 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 확대할수록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면적은 작아지지만 그 안에서 그간 볼 수 없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러면서 추상화(化) 되는 경향이 나타나죠.”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이 세포의 확대된 모습을 보면서 반짝이는 별들과 은하수의 움직임까지도 상상하는 이유다. “작은 공간을 들여다보고 확대해 보면 그 속에 무한히 넓은 공간이 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작은 공간이지만, 넓은 공간이기도 하다. 크고 작다는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상대적이다”라는 작가의 말이 이어진다.
미술평론가 정현은 이강욱의 작품에 대한 평론 ‘세계의 표면 너머의 울림을 향하여’에서 “그림(picture)에서 회화(painting)로의 진화”를 이야기하며 “그림이 주어진 미학적 요구에 맞는 형식미를 추구했다면, 회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잠재성을 향해 나아갔다”고 적었다. 대상의 형태나 형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존재의 본질로서 세포를 파고든 이강욱의 ‘회화론’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초기 ‘지오메트릭(Geometric)’ 시리즈는 점, 선, 면 같은 기하학적 요소와 색채를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형태로 표현해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이후 이어진 ‘인비저블 스페이스(Invisible Space)’ 시리즈에서는 선의 흐름과 연결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공간의 관계성과 깊이를 탐구했다.
이강욱은 보이지 않는 본질을 그린 후 더 희미하게 지워간다. 이는 물감을 스펀지로 문지르거나 입으로 불어 만든 번짐과 에어브러쉬로 뿌린 흔적들을 반복적으로 쌓아 올리는 ‘제스처(Gesture)’ 연작에서 절정을 이룬다. 작가적 기질에 기반한 회화적 행위의 본질이 드러난다. 반복성, 행위성이 두드러진 그의 작업이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단색화’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번에 선보인 최신작 ‘화이트 제스처(White Gesture)’는 흰색을 중심으로 캔버스 위에 투명한 층을 겹겹이 쌓아 빛과 형태의 조화를 실험했다. 집요하게 탐색해 온 ‘공간성’에 대한 연구가 더욱 섬세해졌고, 소위 ‘백색회화’로 실험한 색의 조화가 전시장 플레이스씨를 에워싼 자연과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과물로서의 작품은, 나뭇잎인 듯 눈송이인 듯 너무나도 자연 친화적이다. 유기적 형태의 힘이려나. 경주 남산을 배경으로 둔 플레이스씨의 경관과 작품이 마치 하나의 자연인 듯 어우러져 절경을 이뤘다. 작품이 빠져나간 자리에 자연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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