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실험 미술의 선구자 이강소(82) 작가가 글로벌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과 손잡고 글로벌 미술 시장에서 새로운 도약을 시작한다. 그 첫걸음 격인 개인전 ‘연하(煙霞)로 집을 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사마’는 지난 50여 년간 이강소가 걸어온 실험과 사유의 여정을 응축해 보여주는 자리다. 해외 컬렉터들에게 그의 예술 세계를 소개하는 충실한 포트폴리오인 동시에 국제 무대에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확장하는 중요한 이정표이기도 하다.
13일 개막한 전시의 초입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일명 ‘던지는 조각’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점토 덩어리를 공중에 던져 떨어뜨려 완성한다. 완성된 형태보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개념을, 예술적 의도보다 우연과 자연의 흐름을 중시하는 작가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작품 중 하나다. 전시 개막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작가는 “오래전부터 해온 작업인데 내 힘과 세계의 균형 사이에서 무언가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아주 재밌다”고 말했다. 작품에는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 어떤 형태가 될지 가늠할 수 없는 ‘불확정성’과 관람자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열린 해석’의 철학도 녹아 있다. 작가는 “나는 그림도 어벙하게 그리고 완성도 잘 못한다”며 “하지만 내가 실수를 해도 관람객들이 상상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결국 현대미술이 가진 가능성”이라고 짚었다.
설치 작품 ‘팔진도’도 비슷한 철학을 드러낸다. 삼국지 제갈공명의 여덟 가지 전술 배치에서 영감을 얻은 ‘팔진도’는 바닥에서 솟아오른 산맥처럼 펼쳐진 오브제들 사이로 관람객들이 저마다 걸으며 작품을 경험하도록 했다. “내 의도보다 지금 느끼는 것에 더 집중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소망이 고스란히 구현됐다. 이강소를 대중에게 ‘오리 작가’로 알린 오리 도상 회화는 물론 사슴과 배(船) 도상이 그려진 대표작도 여럿 전시됐다. 어린 딸과 함께 과천 서울대공원에 즐겨 다니던 경험에서 비롯된 사슴과 오리 그림은 세부 묘사를 생략한 강렬한 선들로 대상의 움직임과 생명력을 포착한다. 작가는 “작품이라는 것이 누구나 똑같이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세계란 환영과 같은 것이고 나는 현대미술이라는 흐름 안에서 그런 헛것을 드러내는 일이 무척 재밌다. 앞으로도 할 게 참 많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가 조각과 회화 작품 위주로 구성된 가운데 이강소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퍼포먼스 작업은 지구 반대편 프랑스 파리에서 펼쳐질 계획이다. 특히 1975년 제9회 파리 비엔날레에서 선보여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한 ‘닭 퍼포먼스’가 9월 타데우스 로팍 파리 전시에서 50년 만에 재현될 예정이다. 긴 줄로 묶어둔 닭에게 모이를 주고 자유롭게 걸어다니게 한 뒤 그 발자국 흔적들을 석고 가루 위에 남긴 작품으로 당시 프랑스 국영 TV에도 소개되는 등 화제를 모았다.
황규진 타데우스 로팍 서울 총괄 디렉터는 “이번 협업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동시대 미술 속에서 이강소 작가가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독자적인 실험성과 사유의 깊이를 세계 무대로 확장해 나가고자 하는 갤러리의 의지를 반영한 결과”라고 말했다. 전시는 8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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