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울에서는 아산정책연구원이 주최한 ‘해방 80년, 한일수교 60년 한반도 정세’를 주제로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다. 미국·일본·중국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대거 초청된 가운데 열기 띤 토의가 진행됐다. 미중 패권전쟁과 관련된 동북아 안보,경제 현안과 북핵 문제가 주 의제였다. 6·3 대통령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는 경우 한미일 축의 대외 정책 기조가 급격하게 변할지에 대한 우려와 민주당 내 대중·대일 관계를 주도하는 주축 세력·인사가 누구일지에도 관심을 보였다.
한일 관계는 민간 부문에서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진전이 있었다. 무역은 1965년 수교 당시 2억 2000만 달러로 시작해 지난해 772억 달러 수준으로 무려 350배가 늘었다. 한때는 1위, 적어도 미국에 이어 2위 자리를 계속 지켜왔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 교역의 최대 핵심 국가로 부상하고 우리 기업들의 해외 진출로 새로운 분업 관계가 형성되면서 일본은 우리의 4위 교역국이 됐다. 대일 무역 적자 해소는 통상정책의 핵심 키워드로 60년간 부르짖었는데도 만성적 현상이 됐다. 역내 분업상 일본은 핵심 기술과 주요 부품의 조달원으로서 우리에게는 절체절명의 국가다. 지난해 일본이 61억 2100만 달러로 투자 1위국으로 등장한 것과도 직결된다.
또 하나는 인적 교류다. 코로나19 팬데믹 발생 이전, 특히 1945년생 해방둥이들이 대거 은퇴한 2015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한다. 2018년 일본인의 한국 방문 295만 명, 한국인의 일본 방문 714만 명 등 1000만 명 수준을 넘어섰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100만 명 미만으로 격감했다가 2023년 다시 봇물 터지듯 증가해 지난해는 방일 882만 명, 방한 322만 명으로 1200만 명을 돌파했다. 청년 세대들이 일본 여행을 아주 선호하고 있다. 또한 베이비부머들이 은퇴하면서 일본 골프 여행에 대거 동참하고 있다. 한편에서 ‘죽창가’를 외칠 정도로 아직도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해 야단법석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고려하면 아이러니다.
해방둥이를 포함한 80세 이상의 인구 수는 1965년의 1352만 명에서 248만 명으로 줄었다. 전체 인구의 4.8%이다. 이 세대는 일본의 식민지 착취가 극심했을 후기 일제강점기 시대를 겪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제국주의 영향으로 위안부나 자원 강제 공출 등에 영향받아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한 세대다. 이 세대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10년 뒤인 2035년쯤에는 한반도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그동안 우리 경제는 상상을 못할 정도로 발전했다. 근저에는 일본을 욕하면서도 끈끈하게 유지한 협력 관계가 있다. 절대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인구 수 차이로 일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지난해 우리의 국민 1인당 GDP가 3만 7000달러 수준으로 일본과 같아졌다. 혹자는 일본을 극복했다는 성급한 평가까지 내고 있다. 정부 고위 관리를 지낸 인사가 “GDP는 유량(flow) 측면인데 축적된 국부(stock) 측면에서는 아직도 일본에 한참 멀었다”고 한 지적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한일 관계는 일본·대만 관계까지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한 가운데 더욱 더 이성적이어야 한다. 필요한 분야는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 과거 흑역사의 관계를 넘어 진정한 이웃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트럼프 2기 들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의 자유무역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중국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동북아 역내는 물론 세계적인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참가자가 전부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었다. 미국 중심의 현 정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참가자가 한미일 3각 동맹 관계도 중요하지만 한중일 3국 관계도 잘 관리돼야 한다고 지적한 대목이다. 물론 쉬운 과제가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세찬 파도를 헤쳐가기 위해 한일 관계를 더욱 돈독히하고 그 토대하에 훨씬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결국 대국과 상대할 때는 이웃 국가와의 공동 보조 외에 뚜렷한 대안이 없어 보인다. 그 차원에서 한일 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도 보다 전향적으로 추진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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