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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영어이름을 사용할 권리[안성훈 변호사의 ‘행정법 파보기’]

지난 2023년 6월 28일 경기 수원시 팔달구 수원시여권민원실에서 한 직원이 발급된 여권을 정리하고 있다. 뉴스1




나는 내 이름이다. 태어나서 이름을 가진 다음에야 하나의 인격이 되고 그 인격을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내 이름이 고유의 내 이름대로 불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권에 적히는 '로마자 이름'에 관한 이야기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는 최근 여권 로마자 성명 변경 불가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쟁점은 이름 중 ‘태’의 로마자 표기였다. 원고는 여권을 신청하며 ‘TA’로 표기했지만, 접수 당국은 이는 국어 로마자 표기법에 맞지 않는다며 ‘TAE’로 정정해 여권을 발급했다. 원고는 영어권에서는 ‘TA’가 자연스럽고 널리 쓰이는 표기라며 원래 신청대로 변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 소송에 나섰다. 법원은 ‘국어 로마자 표기법’은 어디까지나 대외적 구속력이 없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일 뿐이라며 상식적으로도 ‘cap(캡)’, ‘nap(냅)’, ‘fan(팬)’ 등 모음 ‘A’를 ‘애’로 발음하는 단어를 무수히 찾을 수 있다고 하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 사회에서 이름은 대개 한자로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순수한 우리말로만 짓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특정 영어 단어나 발음을 염두에 두고 아예 영어 이름을 우리말로 표기해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이름이 여권 발급 과정에서 원래 의도한 영어 표기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국어 로마자 표기법은 한국어를 로마자로 바꾸는 데 유용하긴 하다. 하지만, 실제 음성과 어감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권법령은 이름을 로마자로 바꿔쓰는 기준의 원칙으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제시하고 있다. 출입국 심사 관리나 우리 여권에 대한 대외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기준을 지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합리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고시가 오래도록 개정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양한 발음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어를 로마자로 단순하게 치환시키는 데는 효과적이나 유연성이 떨어진다. 반대로 영어 등을 한국어로 바꾸는 것에는 기능을 다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Hermione’를 발음해보면 헤르미온느, 헤르미오네 등으로 읽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실제로 발음할 때는 ‘헐마이오니’라고 읽는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헐마이오니를 동경하는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헐마이오니라고 지었다면, 국어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어떻게 써야 할까? Heolmaioni다. 허마이오니라고 지었다면, Heo Maioni라고 적어야 한다. 헤르미오네, 헤르미온느로 짓는다고 해서 Hermione라는 로마자 표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Hereumione, Hereumionneu, 이렇게 적힌다.

이런 한계 때문에 유연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여권법 시행규칙 제2조의2 단서는 로마자로 표기하는 외국식 이름 또는 외국어와 음역이 일치할 경우는 그 외국식 이름 또는 외국어를 여권의 로마자 성명으로 표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애초에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먼저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의 경우 다시 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경우에 잘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6월에 태어난 아이라는 점을 기념하고자 ‘June’이라는 영어 이름을 먼저 짓고, 이것을 우리말 이름으로 ‘주은’이라고 지은 게 바로 그런 사례다. 이 사안에서도 외교부는 여권이름 기재를 불허했지만 행정심판위원회에서 그 결정을 바꾸었다. 그런데 이번 판결처럼 애초에 우리말로 ‘태’가 들어가는 이름을 짓고 이를 영문으로 ‘TA’로 기재하는 것은 위와 같은 유연한 규정이 적용되는 상황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이에 법원은 ‘로마자 표기법’을 기준으로 하는 것 자체가 법규적 효력이 없다면서 ‘원하는 이름표기를 가질 권리’에 더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름의 영문 표기 기준을 정하는 이유는 국가행정의 효율성과 여권의 대외 신뢰도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름 사용의 맥락이 점차 넓어지고 개인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실현하는 방식이 다양해지는 지금의 시대에 영문 이름 짓기에 관해 지나친 엄격성만을 일관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보인다.

서경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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