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바이오텍들은 자금과 인력 확보의 어려움 속에서도 독보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성장 스토리를 써나가고 있습니다. <김정곤의 바이오 테크트리>는 K바이오텍의 창업과 성장 과정, 기술과 비전 등을 종합 분석하는 코너입니다. 지면과 온라인을 연계해 풍부한 투자 정보를 전달해드립니다.
보로노이가 비소세포폐암 치료제의 대명사인인 ‘타그리소’, ‘렉라자’의 아성에 도전한다. 글로벌 빅파마 아스트라제네카(AZ)의 타그리소와 존스앤드존슨(J&J)과 유한양행이 공동 개발한 렉라자의 내성을 극복한 차세대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돌연변이 표적항암제 ‘VRN11’를 통해서다.
VRN11은 이미 동물실험인 전임상 단계에서 뛰어난 약효와 안전성을 입증했다. 현재 진행 중인 미국암연구학회(AACR) 2025에서는 강력한 항암 효과와 안전성, 압도적인 뇌 투과율 등 2차 치료제로서 유의미한 임상 1상 중간 데이터로 시장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며 기술이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보로노이는 VRN11의 기술이전을 서두르지 않을 방침이다. 조기 기술이전보다는 파이프라인의 가치를 더 높게 받을 수 있는 수준까지 자체 임상을 더 진행하며 시기를 저울질하겠다는 입장이다.
김대권 보로노이 연구부문 대표는 27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술이전을 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파이프라인의 가치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스윗 스팟(sweet spot)’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윗 스팟은 야구에서 배트나 골프에서 드라이버로 공을 칠때 힘이 가장 효과적으로 실리는 지점을 말한다.
보로노이는 세포 내 정보 전달에 관여하는 ‘키나아제(Kinase)’를 표적 치료하는 기술로 주목 받아왔다. 정상 세포가 아닌 암을 유발하는 돌연변이 세포만 타겟으로 치료하는 ‘선택성’에 있어서 국내 최고 기술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2015년 설립돼 상장 전인 2020년 미국 오릭파마슈티컬스, 2021년 HK이노엔 등 총 4건의 기술이전 사례가 있다.
보로노이는 이후 기술이전이나 눈에 띄는 임상 결과 등 시장에서 반길만한 성과는 보여주지 못해 ‘만년 유망주’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AACR 2025에서 3년여간의 긴 침묵을 깨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준 만큼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관심이다.
증권가에서는 보로노이가 타그리소 등 역대 비소세포폐암 치료제를 뛰어넘는 가장 위대한 선수인 ‘GOAT(Greatest of All Time)’가 될 수 있다는 분석(현대차증권)도 나왔다. 단백질 선택성이 높은 표적항암제의 강자로 불리는 보로노이의 설립부터 주요 파이프라인, 신약개발 경쟁력 등을 분석해 본다.
1976년 동갑내기 김대권 연구부문 대표, 김현태 경영부문 대표가 역할 분담…사명(社名)은 러시아 수학자 이름에서 유래
보로노이는 1976년생 동갑내기인 김대권 연구부문 대표와 김현태 경영부문 대표가 각자 대표 체제로 이끌고 있다. 회사는 2015년 설립됐지만 본격적으로 신약개발에 나선 것은 2016년부터다.
김대권 연구부문 대표는 서울대 약대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제약사와 국책연구원 등에서 다양한 연구개발(R&D) 및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19년 보로노이에 합류했고 바이오연구소, 임상개발팀, 의약화학연구소, AI연구소 등 R&D 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김현태 경영부문 대표는 펀딩과 자산운용에 강점이 있는 증권업계 출신이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경영대학원(MBA) 과정을 수료했다. 증권업 계에서 펀드 운용 및 자산운용을 하다가 2016년 10월 보로노이 최대 주주로 합류했다. 보로노이 창업 멤버인 김현석 AI연구소장은 김현태 대표의 친동생이다.
김현태 대표와 김대권 대표는 대학 동문으로 보로노이 설립 이전부터 신약 개발에 대한 의견 등을 나누며 교류해 왔다. 김대권 대표는 “김현태 대표가 제가 하는 일(제약 부문)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결국 신약개발을 같이 해보자는 쪽으로 뜻을 모으게 됐다”고 밝혔다. 김현태 대표의 자본시장에 대한 경험과 김대권 대표의 신약개발 경험이 보로노이에 그대로 녹아 있는 셈이다.
선택성이 높은 최적화된 신약을 개발하자는 의미를 담은 보로노이라는 사명은 러시아 수학자 게오르기 보로노이의 이름에서 따왔다. 평면을 특정 점까지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점들의 집합으로 분할하는 최적화 모델인 보로노이 다이어그램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보로노이 다이어그램은 위치정보시스템(GPS) 기술 등에 활용된다.
김대권 대표는 “신약을 개발하다 보면 분자 활성, 약물성, 반감기, 독성 등 여러 파트를 절충하고 최적화된 모델을 찾고 설계하는 게 중요하다”며 “좀 더 합리적인 모델을 개발해보자라고 시작한게 사명이 됐고 보로노믹스가 됐다”고 설명했다. 보로노믹스는 보로노이가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AI) 신약개발 플랫폼이다. 표적항암제를 찾는데 최적화된 선택적 파이프라인을 개발하자는 목표가 사명과 플랫폼에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AI 신약 설계 플랫폼 ‘보로노믹스’로 파이프라인 발굴…동물실험실에서 직접 실험 강점
보로노이는 질병의 원인이 되는 표적 단밸질과 정확하게 결합하고 그 이외 나머지 정상 단백질에 결합하지 않는 ‘선택성’ 파이프라인 개발에 경쟁력이 있다. 질병의 원인에만 결합하는 약물이라 부작용 걱정이 없는 항암제 개발에 특화된 셈이다.
보로노이는 120명의 신약개발 전문 인력에 AI 연구소, 동물실험센터, 합성연구소 등 자체 연구개발(R&D)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다. 자체 AI 신약 설계 플랫폼인 보로노믹스를 사용해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있다. 분자 모델링, 구조생물학 협업의 AI 플랫폼을 자체 개발해 4~4.5년 가량 걸리는 평균 개발 기간을 1~1.5년으로 단축할 수 있다. 국내 최대 키아나제 풀 프로파일링 데이터베이스(DB)를 통해 연 55만개의 화합물 실험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생체 내 실험인 ‘인비트로 (in vitro)’, 생체가 아닌 세포 밖 실험인 '인비보 (in vivo), PK 및 독성 평가를 위한 바이오 연구소 및 동물 실험센터를 보유해 R&D 효율을 극대화하고 있다.
신물질의 탐색과정에서 보로노이는 인실리코 시스템을 이용한 분자모델링, 엑스레이 구조결정학, AI를 활용해 빠르게 선도 물질을 도출하고 있다. 하버드대 의과대학 산하 다나파버암센터(DFCI) 교수이자 B2S바이오의 공동 창립 멤버인 나다니엘 그레이 박사와 공동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주요 파이프라인은 VRN07, VRN11, VRN10…“암 종양이 줄어들고 뇌투과율은 100%”
보로노이는 다양한 표적 항암제와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고형암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비소세포폐암과 유방암 치료제가 핵심 파이프라인으로 꼽힌다.
VRN11은 경구 투여용으로 개발 중인 차세대 EGFR 비소세포폐암 치료제로 현재 보로노이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파이프라인이다. 현재 임상 1a상이 진행 중이다. 보로노이가 AACR 2025에서 공개한 임상 1a상 데이터에 따르면 VRN11은 선택성과 뇌혈관 투과율에서 경쟁 약물 대비 높은 경쟁력을 보였다. 김대권 대표는 “화학항암요법 치료를 1년 이상 받았던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을 한 결과 암 종양이 30% 이상 줄어드는 케이스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VRN11은 기존에 EGFR 표준 처방을 1개 이상 받았지만 내성 문제로 치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을 진행한 결과 2차 치료제로서 무진행생존기간(PFS)와 객관적반응률(ORR)에 대한 증거도 확보했다. 특히 약물 용량을 40mg에서 4배나 늘린 160mg에서도 부작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용량을 계속 늘리는 임상이 계속 진행 중이다.
VRN11은 기존 폐암 치료제 중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진 3세대 치료제 타그리소가 듣지 않는 C797S 돌연변이에도 효과를 보이고 있다. 2차 치료제를 목표로 개발 중인데 단순히 내성만 해결하는게 아니라 폐암 환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기본적인 EGFR 돌연변이(Del19, L858R)까지도 치료할 수 있어 향후 1차 치료제로서 확장 가능성도 기대되고 있다.
특히 VRN11은 암세포가 뇌로 전이된 환자에게도 효과가 있다는 점이 임상을 통해 입증됐다. 실험용 마우스를 이용한 연구에서 VRN11은 기존 치료제보다 뇌조직 투과율이 100% 가깝게 나와 암세포를 더 오래 효과적으로 억제했다. 임상 1a상 데이터에 따르면 인간에 가장 가까운 원숭이 실험에서도 뇌혈관장벽(Blood Brain Barrier·BBB) 투과율이 100% 이상이었다.
김대권 대표는 “VRN11 40mg을 투약한 환자의 자기공명영상(MRI)에서 뇌전이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종양(10.6mm 크기)이 2개월 뒤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며 “뇌전이 환자 7명의 질병관리율(DCR)이 85.7%로 임상 시작 용량인 10mg에서부터 충분한 치료 효과가 있음이 증명됐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EGFR 특수 돌연변이(엑손20 삽입 돌연변이)를 타겟으로 하는 ‘VRN07’, HER2 양성 유방암 환자의 뇌전이를 치료하는 ‘VRN10’ 등 다양한 신약 파이프라인에 대한 임상이 진행 중이다. VRN10은 계열내 최고 물질(best-in-class)를 목표로 개발 중인 HER2 양성 유방암 표적 치료제다. 항체약물접합체(ADC)가 뛰어난 항암 효과를 바탕으로 타겟 항체를 대체하고 있지만 효과가 높은 만큼 독성도 심해 내약성이 뛰어난 약물에 대한 수요가 높다.
보로노이는 향후 ADC로 HER2 양성 유방암 치료제가 재편될 경우를 대비해 ADC에 의한 획득 내성을 극복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비임상 실험결과 VRN10은 FDA 승인 약물인 투카티닙, 네라티닙, 레파티팀 대비 월등한 약효와 뇌 투과도가 확인됐고 기존 약물들의 획득 내성 돌연변이에 대해서도 활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임상 단계인 ‘VRN04’는 자가면역질환을 표적하는 파이프라인이다. RIPK1 저해제 분야에서 계열내 최초(first-in-class) 신약을 목표로 개발 중이다. RIPK1은 자가면역질환의 주요 요인인 TNF-알파 신호 전달에 관여하는 키나아제다. 주사제에 비해 경구 투여가 가능해 환자의 복용 편의성이 뛰어나다.
또 TNF 항체 치료제의 대표적인 부작용인 TNF 수용체 타입 저해로 인한 허혈성 뇌졸중 발생 위험이 없어 TNF 항체 시장을 대체할 것으로 기대된다. 보로노이는 VRN04를 궤양성 대장염을 포함한 자가면역성 염증 질환 치료제로 개발하고 있다.
‘VRN13’은 폐동맥 고협압 치료제다. 경구용 흡입 약물로 폐동맥에 직접 약물을 전달해 전신 부작용이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약물이다. PDGFR 수용체에 대한 선택성이 매우 높고 부작용의 원인으로 알려진 VEGFR-2억제 정도가 매우 낮아서 안전한 약물로 개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매출 3년간 없지만 부채비율 낮고 현금 유동성도 문제 없어…“기술 이전 서두르지 않겠다”
보로노이는 최근 3년간 매출이 발생하지 않았다. R&D 중심 신약개발 기업이고 같은 기간 기술이전이 없다보니 생긴 현상이다. 2024년 기준 매출 0원, 영업손실 363억 원, 손순실 326억 원을 기록하며 적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같은 기간 누적 손실은 약 1900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부채비율(10.9%), 총 차입금(10억원)이 적어 재무 부담은 크지 않은 편이다.
이 같은 적자 재무재표는 신약개발을 하는 바이오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다만 앞으로 중요한 것은 현재 진행 중인 임상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높은 가치의 기술이전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의 여부다.
가장 좋은 베스트 시나리오는 주력 파이프라인인 VRN11·VRN10 등의 임상 성과 및 기술이전 계약 성사 가능성이다. 오릭파마슈티컬스에 기술이전한 VRN07(오릭-114)의 마일스톤이 올해부터 들어올 예정이며 앞으로 글로벌 임상 진전으로 로열티 수익도 기대된다.
김대권 대표는 “R&D를 위한 현금 유동성에 전혀 문제가 없다”며 “기술이전에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보로오이는 국내 바이오텍 중 가장 의사 결정과 실험 속도가 빠른 기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국내 최대 규모 신약 물질 특허도 이 같은 기반에서 나왔다”며 “우리 기술로 글로벌 수준의 기술역량을 가진 신약을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낼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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