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발 관세전쟁 여파로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선에 바짝 다가서는 가운데 금융사의 달러 대출이 1년 새 2조 원 넘게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달러로 돈을 빌려 썼던 수출입 기업들이 원리금 부담에 대거 상환에 나선 결과다.
9일 금융계에 따르면 KB·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은행의 달러 대출 잔액은 4일 기준 69억 1300만 달러(약 10조 2500억 원)로 집계됐다. 지난해 4월 말 대비 14억 3100만 달러 급감했다. 2023년만 하더라도 100억 달러를 웃돌았던 달러 대출은 지난해 80억 달러 선으로 주저앉았고 올 들어서도 매달 줄어드는 추세다.
달러 대출은 기업이 수출입에 필요한 자금을 융통할 목적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업들은 통상 3년 만기로 대출을 일으키지만 별다른 변수가 없으면 일반적으로 만기를 연장하며 필요 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해왔다.
예년과 달리 달러 대출이 크게 줄고 있는 것은 지난해 말부터 비상계엄과 탄핵 여파에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선을 크게 웃돌면서 원화 약세 흐름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자금을 대출한 기업 입장에서 보면 원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원화로 환산한 상환 부담이 커진다.
한미 간 금리 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기업이 달러 대출을 받을 유인이 줄어든 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0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내리면서 한미 기준금리 차이는 1.75%포인트까지 벌어졌다. 미국이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2년간 제로금리를 유지할 때만 해도 달러 대출을 받는 게 상대적으로 유리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모양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일으킨 달러 대출 만기가 지난해부터 차례로 돌아오면서 달러 대출 상환 규모는 더 커졌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국내 유력 대기업 한 곳이 기존 달러 대출을 상환하면서 시중은행 한 곳에서만 한 달 만에 잔액이 8억 달러 이상 줄었다.
은행권에서도 신규 달러 대출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환율 인상 시기에 달러 대출을 늘리면 원화로 표기하는 장부에 위험가중자산이 평소보다 더 크게 잡히기 때문이다. 위험가중자산이 늘면 은행의 건전성 지표인 보통주자본비율은 더 떨어진다. 원화 약세에 외화 자산 보유 부담이 그렇지 않아도 커지는 상황이라 이탈 고객을 붙잡을 유인이 크지 않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자본 비율을 고려하면 굳이 달러 대출을 취급할 이유가 없다”며 “선제적으로 조정해 두려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미중 관세전쟁의 여파로 위안화 약세가 심해져 원화가 동반 하락하고 있는 터라 달러 대출 감소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달러 대출이 준 것은 기업들의 수요가 줄어든 게 주요 원인”이라며 “원화 약세 때 달러 대출이 늘면 재무 부담이 더 커지는 만큼 은행 입장에서도 굳이 대출 연장을 유도할 필요가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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