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상호관세 우선 적용 대상에서 반도체를 제외했음에도 미 대표 메모리 업체 마이크론이 ‘관세발 가격 인상’을 통보했다. 마이크론은 메모리 모듈과 솔리드스테이트(SSD)는 관세 적용 대상이라며 ‘반도체 완제품’이 관세를 피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미 원가 인상과 수요 감소, 경쟁 심화에 시달리는 중인 반도체 업계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8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은 마이크론이 상호관세가 시작되는 9일부로 메모리 모듈과 SSD 가격 인상을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마이크론은 지난달 말 가격 인상과 별개로 관세 영향을 이유로 들었다. 마이크론은 고객사에 보낸 서한에서 “반도체는 관세 부과 대상이 아니지만 메모리 모듈과 SSD에는 적용된다”고 밝혔다고 한다.
반도체 칩셋은 관세가 없더라도 패키징을 통해 기판(PCB)에 붙어 완제품화되면 관세 적용 대상이라는 뜻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칩셋만 거래되는 사례가 드물다. 사실상 모든 메모리가 관세 영향을 받게 되는 셈이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백악관이 반도체를 관세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 밝혔을 때 칩셋만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없어 업계 모두가 확인에 어려움을 겪어왔는데 미국 기업인 마이크론이 간접적으로 확인해준 셈”이라고 말했다.
메모리 모듈이 관세 적용 대상이라면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는 물론 마이크론도 타격을 피할 수 없다. 마이크론은 미국 외에도 중국, 대만,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메모리 칩을 만든다. 특히 메모리를 모듈화해 완성하는 패키징 공정은 대부분 미국 밖에서 이뤄진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패키징을 비롯한 후공정은 인건비와 효율성에 따라 동남아 등 글로벌 각지 외주기업(OSAT)이 맡는 경우가 많다”며 “그간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에 힘써왔던 미국 반도체 업체들도 뒷통수를 맞은 셈”이라고 했다.
반도체 업계는 트럼프가 반도체 관세를 “곧 발표”하겠다고 밝힌데다 경제 악화가 심각한 만큼, 9일 본격적인 상호관세 적용 시점 또는 그 이후 면제 범위가 확대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면세 범위가 모듈 등 완제품까지 확대되더라도 여전히 광범위한 공급망 타격과 원가 상승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반도체 원재료는 대다수가 미국 밖에서 생산된다. 원판인 실리콘 웨이퍼는 일본 신에츠화학공업, 독일 실트로닉, 대만 글로벌웨이퍼스, 한국 SK실트론 등이 대표주자다. 노광 과정에 쓰이는 포토레지스트, 세정에 쓰이는 불산 등 소재 또한 마찬가지다. 네덜란드 ASML, 독일 자이스, 일본 TEL 등 주요 장비 업체도 글로벌 각지에 산재해 있다.
공급망 전반의 비용 폭증이 예상되는 가운데 그간 수요를 이끌어온 인공지능(AI) 시장은 얼어붙고 있다. 이날 디인포메이션은 IT 컨설팅그룹 어퍼엣지를 인용해 “2025년 이미 예산 압박에 시달리던 대기업들이 마이크로소프트(MS), 세일즈포스, SAP, 오라클 등 AI 클라우드 서비스 계약 논의를 중단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곧 데이터센터 투자가 삭감됨을 의미한다.
벤처 투자도 급속 동결중이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VC) 허슬펀드 공동 창립자 에릭 반은 전날 투자 대상 스타트업들에 “최근 펀드 모금이 당분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게 안전하다”며 “현금 소모 압박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대외 상황 악화와 동시에 반도체 시장 내 경쟁도 격화하고 있다. 수요 감소가 예상되는 와중 시장 점유율 싸움이 치열해지는 구도다. 이날 뉴욕증시에서 중앙처리장치(CPU) 대표 기업인 인텔과 AMD는 각각 7.36%, 6.49% 하락했다. 새 최고경영자(CEO)를 맞은 인텔이 CPU 시장 내 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저가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키뱅크 캐피탈의 보고서에 양사 마진율 하락 우려가 커진 여파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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