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한국화랑협회에서 만난 이성훈(67) 신임 한국화랑협회 회장은 인터뷰에 앞서 두툼한 서류 뭉치부터 꺼내 놓았다. 손때 가득한 서류에는 여기저기 메모가 빼곡했다. 서류 뭉치의 정체는 지난해 7월 시행된 미술진흥법과 시행령, 미술 진흥에 관한 해외 법령과 논문 등이다. 이 회장은 내년부터 순차 도입될 계획이지만 구체적인 법안 내용은 하나도 밝혀지지 않은 ‘미술서비스업 신고제’와 ‘재판매 보상청구권(추급권)’이 한국 화랑의 생존을 좌우할 중대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신고제와 추급권 모두 어영부영 시행될 경우 자칫 한국 화랑을 고사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며 “내가 출마한 이유와 당선된 의미도 바로 이 법안에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월 제22대 회장 선거에서 선출돼 국내 170여 화랑을 대표하게 된 이 회장의 주특기는 ‘법’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연수원 14기를 수료한 뒤 1985년 전주지방법원 판사로 임관해 서울고등법원·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등 20여 년의 법관 생활을 했고 2008년부터 법무법인 바른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인 ‘정통 법조인’이다. 화랑협회 사상 첫 법조인 회장이 된 그와 화랑업의 인연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1977년 서울 인사동에 선화랑을 세운 고(故) 김창실 제5·8대 화랑협회장의 장남으로 2011년부터 아내 원혜경 씨와 선화랑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이 회장은 미술서비스업 신고제에 대해 “현재 자유업으로 운영되는 화랑을 제도권 내로 편입해 글로벌 갤러리와 어깨를 견주도록 육성하겠다는 미술진흥법의 취지는 이해한다”면서도 “걱정 반 기대 반”이라는 말로 우려를 드러냈다. 그는 “화랑업은 세계 어디에서도 자유업으로 운영된다”며 “신고의 경우 인가·허가와 비교해 규제가 덜 한 편이지만 자칫 신고 규정이 모호해질 경우 인가 만큼이나 문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신고 요건을 직원 수나 전시장 면적 같은 인적·시설 요건으로만 정할 경우 화랑업의 본질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회장은 “화랑업의 본질은 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해 후대에 문화 유산을 남기도록 돕는 일종의 ‘문화 사업’”이라며 화랑협회만 해도 3년 이상 기획전을 했는지 등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회원을 선별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신고 규정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다면 양질의 화랑은커녕 공간만 빌려 주는 ‘대관 화랑’이나 작가 발굴 없이 미술품 중개만 하는 ‘세컨더리 화랑’ 등이 오히려 득세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2027년 도입이 예고된 ‘추급권’은 더 큰 문제다. 이 회장은 “그대로 시행된다면 한국 화랑 절반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추급권은 미술품이 재판매될 때마다 창작한 작가에게도 재판매 금액의 일부를 보상하도록 한 권리다. 미술품이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점점 더 비싸지는데 반해 작가는 여전히 빈곤한 현실을 해결하고자 프랑스에서 1920년 처음 도입됐다. 하지만 기업보다 개인 거래 비중이 높은 한국 시장에는 맞지 않는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추급권은 개인 간 거래나 일정 금액 이하의 작품에 대해서는 제외돼 결국 화랑 거래만 대상이 된다”며 “화랑은 그림을 재판매할 때마다 판매가와 판매처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데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개인들의 구매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추급권이 ‘잘 팔리는 작가’들만 더 큰 돈을 버는 등 실효성 논란이 있고 미술품 수입국에는 불리해 미국조차 시행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면서 “화랑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이 회장은 “선진 미술 시장은 한국과 반대로 기업 고객이 시장의 80%를 차지하는데 기업들은 작품 매입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크게 꺼리지 않는다”며 “기업의 미술품 구매에 대한 경비 산입 금액 등을 높일 수 있다면 시장이 기업 중심으로 변해갈 것이고 그때는 추급권 도입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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