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을 끌고 있는 의정 갈등에 따른 극심한 의료 공백은 국내 의료 시스템과 국민들의 의료 이용 패턴을 크게 바꿔놓았다. 대형 병원들의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환자를 받기 어려워지자 가벼운 증상에도 응급실을 찾거나 무조건 상급종합병원부터 고집하던 ‘과잉 의료 소비’는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의료진들은 과중한 업무로 집단적 ‘번아웃’ 상태에 내몰리고 있어 의료 현장이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5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진료협력병원에서 상급종합병원으로 환자를 회송한 건수가 지난해 10월 5632건에서 12월 1만 8758건으로 233%나 증가했다. 1·2차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3차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진료 의뢰도 같은 기간 4667건에서 7272건으로 56% 늘었다. 동네 병원 등에서 우선 진료를 받고 질환의 중증도에 따라 상급종합병원으로 전원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기존에도 이런 시스템이 구축돼 있었으나 경증 환자들도 종합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흐름은 대형 병원들이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후 경증 환자 진료를 줄이며 체질 개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전국 47개 상급종합병원은 일반 병상을 줄이고 중증·응급환자 진료는 늘려 정부로부터 수가(의료 행위 대가) 지원을 받는 구조 전환 사업에 일제히 참여했다. 이 사업에 따라 상급종합병원들은 경증 환자를 바로 받지 않는 대신 진료협력병원을 통해 신속하게 환자들을 이송 받는 패스트트랙을 가동했다. 상급종합병원 중 32곳은 협력병원을 통해 입원할 경우를 위해 패스트트랙 전용 예약 슬롯을 운영하고 있으며 나머지 11곳도 상반기 중 도입한다.
응급실 집중 현상도 완화하는 추세다. 올 설 명절 기간이었던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2일 사이 응급실을 찾은 환자는 하루 평균 2만 5041명으로 지난해 설 연휴에 비해 약 32.3% 줄었다. 중증도 분류 체계에서 4~5급에 해당하는 경증 환자가 같은 기간 43.9%나 급감한 영향이다. 응급실을 찾는 경증 환자가 줄면서 전체 환자에서 중증 환자가 점하는 비율은 5.7%로 지난해 설 연휴(3.8%), 추석 연휴(4.6%)를 웃돌았다.
반면 의료 공백으로 인한 문제점들은 임계점에 달하고 있다. 특히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메워온 의대 교수와 전임의, 진료지원(PA) 간호사 등 의료진들의 피로 누적이 심각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전국 상급종합병원의 전공의 비율은 2023년 말 38.5%에서 지난해 말 10분의 1 수준인 4%로 급감했다. 이달 3일 기준 전국 211개 수련병원에 출근 중인 전공의는 1172명으로 출근율이 고작 8.7%에 불과하다. 지친 전문의들은 대형 병원을 떠나고 있다. 지난해 3~10월 전국 수련병원 88곳에서 사직한 의대 교수 등 전문의는 1729명에 달해 전년 같은 기간의 2배에 달했다. 하은진 서울대병원 중환자의학과 교수는 “통계로 잡히지 않지만 현장에서 진료의 질적 퇴보가 명확히 느껴진다”며 “이로 인한 좌절감 같은 게 의료 현장에 만연해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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