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21일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 공개매수를 시도한 최윤범 고려아연(010130)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최 회장 측이 배임 등 법적 리스크에서 벗어나면서 23일까지 자사주 공개매수가 유효하다. 다만 공개매수로 지분 20%를 확보해도 실제 갖게 되는 의결권은 베인캐피털의 2.5%가 최대라 영풍·MBK파트너스 간 지분 경쟁은 당분간 더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영풍·MBK는 이르면 24일 임시 주주총회 소집과 장내 지분 매입을 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50부(김상훈 수석부장판사)는 영풍이 최 회장 측을 상대로 낸 공개매수 절차 중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기각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주권상장법인이 상법 제341조 제1항이 규정하는 방법으로 자기 주식을 취득하는 경우에는 이사회 결의로써 자기 주식을 취득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주총 결의를 거치지 않았다고 해도 자본시장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매수한 자기 주식을 전부 소각하기로 한 이상 이를 업무상 배임 행위라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로 사모펀드(PEF) 등의 인수합병(M&A) 시도에 직면한 해당 기업의 경영진이 자사주 매입 후 소각이라는 새 경영권 방어 옵션을 갖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만약 최 회장 측이 자사주 공개매수에서 지분 20%(자사주 취득 후 소각 17.5%+베인캐피털 2.5%)를 모두 확보한다면 우호 지분의 이탈이 없을 경우 지분율은 총 37.06%가 된다. 이는 영풍·MBK의 지분 38.47%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 지분을 뺀 지분율은 영풍·MBK와 최 회장 측이 각각 49% 대 46%로, 결국 7.83%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로 떠올랐다.
양측은 장내 지분 매입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되나 유통 물량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후 임시 주총과 내년 3월 정기 주총까지 이사회를 차지하기 위한 표 대결이 치열해지게 됐다.
법원 판결에 따라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가 허용됐지만 최 회장 측과 영풍·MBK파트너스의 지분율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점은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까지 장기전을 예고한다. 공개매수에 이어 지분 과반을 차지하기 위해 시중에 남아 있는 3~4%의 물량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 약간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MBK 측은 서둘러 임시 주총 개최를 요청해 정기 주총까지 두 차례의 기회에서 최대한 이사진을 늘릴 계획이다. 최 회장 측 역시 트라피구라 등 우호 세력을 최대한 결집하면서 지분 매입과 자사주를 활용한 의결권 확대를 꾀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려아연 주가는 이날 전 거래일 대비 6.43% 상승한 87만 7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장 초반 76만 1000원까지 하락했던 것이 법원의 기각 판결 이후 자사주 공개매수 가격인 89만 원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이날이 공개매수에 청약할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공개매수가 성공할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다만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는 지분이기 때문에 주총 표 대결에서 아무 역할을 할 수 없다. 최 회장 입장에서는 공개매수에 성공하더라도 베인캐피털의 2.5%만 더해지기 때문에 우호 지분을 모두 잡아둔다고 해도 37.06% 대 38.47%로 지분 대결에서 MBK 측에 밀린다. 의결권 확보를 위한 장내 지분 매수와 우호 세력 포섭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최 회장은 다음 달 방한하는 협력사 트라피구라 경영진에 지분 매입을 요청하는 방법이 있다.
고려아연이 기존에 보유한 2.41%의 자사주를 활용해 의결권을 확보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고려아연은 올 7월 1.4%의 자사주 매입을 마쳤고 8월에 4000억 원 규모의 자사주 신탁계약을 한국투자증권과 체결했다.
금융감독원의 유권해석에 따르면 자사주 취득이 연속으로 이뤄질 경우 마지막 계약일 기준 6개월 후부터 처분이 가능하다. 즉 내년 2월 이후 자사주를 우호 세력에 넘길 수 있다. 다만 이때는 정기 주총을 위한 주주명부가 확정되는 올해 12월 31일이 지나버려 의결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본시장법 시행령 제176조의 2에 따르면 △임직원에 대한 상여금으로 자기주식을 교부하는 경우 △우리사주조합에 처분하는 경우 등 예외가 있어 고려아연이 이런 방법을 쓸 수도 있다. 단, 경영진이 경영권 유지를 목적으로 종업원의 자사주 매입에 회사 자금을 지원한 경우 배임으로 본 대법원 판결도 있어 법적 공방이 발생할 리스크는 변수다.
MBK 역시 공개매수가 끝난 뒤 주가가 하락할 때 장내에서 추가로 지분을 확보하며 공세를 이어갈 것이 확실시된다. 임시 주총 소집을 요구해도 회사가 거부하면 법원 가처분 허용까지 가야 해 통상 2~3개월이 걸린다.
변수는 최대 20%가 자사주 공개매수에 응하고 나면 어느 정도의 물량이 남아 있을지다. 시장에서는 국민연금과 액티브 펀드 등이 일부 정리를 하면 약 3~4% 유통 물량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양측이 이를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영풍·MBK는 이사회를 장악해 최 회장을 해임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이사 해임은 출석 주주 3분의 2의 동의가 필요한 특별 결의 요건이라 당장은 불가능하다. 추가 이사 선임을 통해 현재 ‘1대12’로 절대적 열세인 이사회 구도를 바꾸는 것이 우선이다. 최 회장 측 이사진 12명 중 정기 주총이 열리는 내년 3월 임기가 만료되는 이사들은 총 5명이다. 이들 숫자를 고려하면 영풍·MBK 연합은 내년 정기 주총까지 최소한 4명 이상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것과 동시에 최 회장 측 인사가 추가 선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반대로 최 회장 측은 기존 이사진의 임기 연장을 도모하거나 신규 이사 후보들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표 대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시장의 눈은 국민연금에 쏠려 있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 지분을 뺀 지분율은 영풍·MBK와 최 회장 측이 각각 49% 대 46%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만큼 더 확실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됐다는 평가다. 공개매수 전 국민연금의 고려아연 지분은 7.83%였지만 시장에서는 운용사에 위탁해 간접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지분의 상당 부분을 처분해 현재 남은 지분율이 4~5% 내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국민연금 자금이 우호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한 기업 재무구조 개선 작업이 아니라 적대적 M&A를 통한 경영권 쟁탈에 쓰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법정 다툼도 장기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MBK는 이날 판결 뒤 대규모 차입을 통한 자사주 공개매수를 결정한 고려아연 현 경영진에 대해 “자사주 공개매수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업무상 배임 등 본안 소송을 통해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이날 법원 결정을 두고 법조계에서는 경영자의 경영권 방어 수단을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했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가처분 결정이기는 하지만 경영권 방어를 해야 하는 대표 입장에서 회사 자금이나 신용을 활용해 차입 후 자사주 매입·소각이라는 방식을 선택할 합법적 길이 열렸다”며 “본안 소송이 예정돼 있더라도 최종 판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만큼 그 전까지는 이번 가처분 결과가 유사 사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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