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 부동산 정책 상품 대출의 공급 목표를 올해와 동일한 55조 원으로 정한 것을 두고 금융권의 우려가 큰 것은 자칫 ‘부채 관리 저지선’이 뚫릴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시장에 신규 정책자금이 공급되면 상환분을 제외하고 70~80%가 잔액으로 남는다. 내년에 55조 원 규모의 정책자금이 시장에 풀리면 전체 가계대출 증가액을 전보다 40조 원이나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책 대출로 늘어난 부채가 전체 가계대출 관리 목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다는 점이다. 그간 금융 당국이 공언해온 가계대출 관리의 최우선 과제는 전체 대출 증가액을 경제성장률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다. 올해 말 기준 가계 신용(약 1900조 원)과 내년도 예상 경상성장률(4.5%)을 감안하면 내년 전체 가계빚 증가분을 85조 원 이내로 조여야 한다. 하지만 관리 목표치의 절반 가까이가 정책 대출로 먼저 채워지다 보니 당국으로서는 지금처럼 은행권을 향한 고강도 대출 규제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최근 은행권 가계부채 증감 실적을 보면 당국의 은행권 대출 규제가 더 강화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내년 총대출 관리 목표와 정책 대출 공급액을 감안하면 은행권 대출 증가액을 월평균 3조 원 수준으로 묶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국이 최근 은행권을 향한 ‘창구 지도’를 쏟아내면서 전보다 조인 은행 자체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이 9월 기준 4조 원인데 이보다 낮은 수준으로 대출을 줄여야 하는 만큼 고삐를 더 강하게 조일 수밖에 없다.
정책 대출 자금이 시장에 지속 유입되면 ‘연쇄 매매’를 부추겨 전체 대출 수요를 다시 자극할 수 있는 만큼 대출 규제를 강화할 필요성은 특히 크다. 서울 외곽에서 시작해 서울 마용성(마포·용산·성동구),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로 이어지는 ‘주택 갈아타기’의 마중물로 정책대출상품이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거래가 연쇄적으로 이뤄지면 집값 상승세를 부추겨 전체 대출 수요를 다시 끌어올리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 있는 점 역시 문제다. 시중은행에서 여신 업무를 담당하는 한 임원은 “정책 대출이 불쏘시개로 작용해 가계대출 수요가 가파르게 상승할 수 있다”면서 “기준금리 인하와 맞물려 파급효과가 특히 클 수 있는 만큼 대출 문턱을 높이는 게 불가피한 면도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 대출이 어려워질수록 실수요자나 서민의 생계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은행 주담대는 주택 구입 목적도 있지만 전세 보증금 반환용이나 생계 자금으로 활용되는 경우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권 대출이 막힌 차주가 급전을 구하려 2금융권이나 대부 업체로 향하면 이들의 이자 상환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보험사인 하나생명은 이날부터 주택담보대출 신규 취급을 전면 중단했다. 대출 수요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급증해 대출 심사를 담당할 인력이 모자라 대출 여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보험사가 주담대 신청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은 하나생명이 처음으로, 삼성생명·교보생명·한화생명 등 보험사는 주담대를 중단하는 대신 금리를 인상하는 방식으로 대출 축소를 유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책 대출 공급액을 적정 수준으로 줄여야만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책 대출을 과감하게 줄이기 어렵다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규제 대상으로 편입해 실제 대출이 나가는 금액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계부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집값을 안정화해야 하는데 집을 사는 데 보태라며 정책 대출을 내주는 것은 집값을 오히려 끌어올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면서 “중장기적으로 정책 대출을 DSR에 포함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아예 부동산 정책 대출 집행 한도를 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자격 요건만 맞으면 대출이 집행되는 방식을 바꿔 월별로 정책 상품 대출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판매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정책대출상품을 통해 무주택자나 취약 계층을 지속해서 지원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면서도 “가계대출 추이를 감안해 필요하다면 적절한 속도 조절이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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