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강제징용 문제를 풀었다. 일본 기업의 배상 참여가 빠진, 말 그대로 한국의 대승적 결단이다. 일본을 3·1절에 ‘협력 파트너’로 선언하고 정치적 부담을 지면서까지 과거사 문제를 푼 배경은 역시 미국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 11일 만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연 한미정상회담에서 보듯 문재인 정부의 ‘운전자·균형자’ 같은 헛꿈을 꾸지 않는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국가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는 권위주의 진영인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한 축이 되고자 한다. 윤 대통령은 이달 열릴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복원할 예정이다.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아 4월 국빈으로 방문할 미국에서는 세계를 무대로 ‘행동하는 동맹’을 선언할 것이다. 외교와 안보, 군사적 측면에서 한반도와 동북아에 국한됐던 한국의 무대도 인도태평양으로 확장된다.
윤 대통령 외교의 선명함과 속도전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중국 외교를 연상하게 한다. 박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최우방인 미국에 특사단을 보내기도 전에 중량급 정치인인 김무성 전 의원을 중국에 특사단장으로 보냈다. 친중 외교의 백미는 2015년 방중해 참석한 중국 전승절 행사다. 박 전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톈안먼 성루에 올라 한국전쟁 때 총부리를 겨눴던 인민해방군의 열병식에 박수까지 치며 중국과 밀착했다.
박 전 대통령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거대한 중국 시장이 열리고 북핵 해결을 위해 중국이 역할을 해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이 2016년 1월 감행한 제4차 핵실험을 사실상 방치했다. 실망한 박 전 대통령이 같은 달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의 도입 추진을 밝히면서 한중 관계는 파탄이 났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는 명분도 실리도 잃었다고 평가받는다.
윤 대통령의 대미 외교는 박 전 대통령의 대중 외교만큼 선명하다. 불안한 것은 중국과 북한의 반작용이다. 쿼드 가입에 속도를 내면 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다시 한번 무역 보복에 나설 것이다. 우리 기업과 경제에 단기적인 아픔이 찾아올 수도 있다. 북한도 뼈아플 시점에 핵실험으로 판을 흔들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몸을 바싹 붙인 미국은 어떤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으로 한국 기업들을 옥죄며 자국 이익만을 챙기고 있다. 내리막을 걷는 수출, 고물가와 고금리의 고통을 겪는 국민들의 마음에는 시간이 갈수록 실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싹틀 것이다. 방일과 방미, 화려한 외교 이벤트가 끝나면 이익을 묻는 시간이 다가온다. 윤 대통령이 빈손으로 돌아와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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