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역대 최대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피해는 인정하지만 일본과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낼 권한은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이 지난 2018년 10월 내린 판결을 2년 8개월 만에 정면으로 뒤집는 내용이다. 피해자들은 즉각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7일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소를 모두 각하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에 대해 보유한 개인 청구권은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해 소멸하거나 포기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히 “청구를 인용해 강제집행까지 마칠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 등까지 고려하면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이는 권리 남용에 해당해 허용되지 않고 결국 피해자들의 청구권은 소구할 수 없는 권리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집행에 나설 경우 국제법을 어기게 된다는 설명이다.
재판부의 판단은 지난 2018년 대법원이 또 다른 강제징용 사건에서 “개인 청구권이 인정된다”며 미쓰비시중공업이 피해자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한 사건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당시 권순일·조재연 전 대법관이 “대한민국이 피해자들에게 한 보상이 매우 미흡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개인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제한됐다”며 소수 의견을 냈는데 이를 따랐다.
판결 직후 원고 측 대리인인 법무법인 한세의 강길 대표변호사는 “대법원 판결과 정반대의 부당한 판결”이라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강 변호사는 “재판부에서 양국 간의 예민한 사항이라 다르게 판단한 것 같다”며 “대법원에서는 배상책임을 인정했기에 각하 여부부터 쟁점을 검토해 항소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번 소송은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 중 역대 최대 규모 사건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5년 처음 소송이 제기된 이후 일본 기업들이 소송에 응하지 않아 재판이 지연되다 지난 3월 법원이 공시 송달을 진행하며 재판이 재개됐다. 앞서 재판부는 소송이 오랜 시간 지연된 점을 고려해 지난달 첫 변론 기일에 곧바로 변론을 종결하고 판결 선고 기일을 지정했다.
재판부의 판결에 대해 법원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대법원 판례는 성문법률하고 다른 만큼 하급심에서 부당하다고 보면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또 다른 부장판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하한 것은 이례적”이라며 “항소에서 어느 쪽 손을 들어주더라도 결국 대법원까지 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15개 시민단체는 공동 논평을 내고 법원 판결을 비판했다. 민변 등은 “국가 이익을 앞세워 피해자들의 권리를 불능으로 판단한한 판결”이라며 “판결이 야기할 정치·사회적 효과를 언급했는데 이는 사법부가 판단 근거로 삼을 영역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한민구 기자 1min9@sedaily.com, 구아모 기자 amo9@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