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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옛 제주 풍경, 그림으로 만나보세요"

['옛 그림으로 본 제주' 출간…미술사학자 최열 인터뷰]

'관동팔경' 못잖은 '제주십경' 부터

이중섭 '서귀포 풍경' 등 135점 망라

순수·몽환적인 향토화풍 돋보여

제주 그림, 미술사적 가치 풍부





제주를 그린 조선의 옛 그림을 떠올리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대답이 많을테고,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에서 그린 ‘세한도’를 용케 떠올리는 경우가 있을 듯하다. 하지만 제주를 그린 옛 그림이 어디 이뿐이겠나. 전작 ‘옛 그림으로 본 서울’에서 125점의 조선 시대 그림을 통해 암울한 근대기와 산업화의 격변이 바꿔놓은 서울의 고운 자태를 보여줬던 미술사학자 최열이 신간 ‘옛 그림으로 본 제주’를 출간했다. 따끈한 새 책을 사이에 놓고 지난 28일 서울경제 사옥에서 저자 최열과 마주 앉았다.

미술사학자 최열


평생을 미술사 연구자로 살았고 최근 20년은 우리 산하(山河)를 그린 그림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닌 저자가 제주를 다시 보게 된 결정적 작품은 ‘탐라순력도’였다. 18세기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제주도의 각 고을을 순회하면서 제주 화가 김남길에게 그리게 한 41폭의 그림으로 이뤄진 화첩이며 보물 제652-6호로 지정돼 있다. 최 작가는 “제주 곳곳을 그린 그림을 들고 실제 그곳을 찾아다니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조선 시대 제주 출신 예술가들이 그린 제주의 그림을 비롯해 한국전쟁 중 10개월간 머문 이중섭의 ‘서귀포 풍경’까지 그림과 그림지도 135점을 망라했다. 일부 공개된 적은 있지만 이들 제주 그림이 책을 통해 집중 조명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17세기 제주화가 김남길이 그린 '탐라순력도' 중 귤나무밭을 그린 '귤림풍악'의 세부. 작품은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가 소장하고 있다. /사진제공=혜화1117


“서울 그림이 문인 화가들의 정신세계를 묘사한 인간계의 그림이라면, 제주 그림은 수만 년 감춰왔던 비경(秘景)의 자연을 묘사한 것이기에 신들의 세계를 담은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진 땅 제주는 제주 만의 독특한 향토화풍을 간직해왔습니다. 주류 한국 미술사의 시선으로는 ‘하늘 아래 처음 보는 그림들’이라 할 법한, 상상 초월의 그림들이에요. 제주를 그린 그림들은 ‘신화의 땅’ 제주의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게 몽환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화풍으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제주십경도' 중 '성산'. 바다 위에 솟은 바위섬을 독특한 시선으로 표현했다. /사진제공=혜화1117




김남일이 그린 ‘탐라순력도’ 중 성산을 그린 ‘성산관일’. 바다 위에 솟은 바위섬을 독특한 시선으로 표현했다. /사진제공=혜화1117


이 책이 발굴하다시피 하여 새롭게 보여주는 그림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10곳을 그린 ‘제주십경(瀛洲十景)’이다. 최 작가는 제주십경을 “제주 미술사를 구성하는 핵심 줄기”로 봤다. 가장 오래된 ‘제주십경’의 기록은 1694~1696년 제주목사로 재임한 이익태가 10폭 병풍그림으로 ‘탐라십경도’를 그리게 했다는 것인데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최 작가는 “그렇게 꼽은 10곳은 한라산 백록담과 영곡, 용두암 옆 취병담과 조천읍 관청 조천관, 구좌읍 하도리의 관청 별방소와 일출봉 성산, 서귀포 관청 서귀소와 천지연, 우뚝 솟은 산방과 한림읍 명월리 관청 명월소까지 아우른다”면서 “아름다운 풍경과 군사 요충지를 적절히 섞은 이익태의 엄선이 일종의 기준이 돼 200년 가까이 지속됐다”고 설명한다.

대정현 동쪽 10리 거리에 외로운 산 하나 해변에 홀로 솟아 전체가 하나의 돌로 되어 참으로 비범하고 험준하니 ‘산방’이요, 한라산 꼭대기 봉우리 가운데가 아래로 움푹 파여 마치 솥과 같아 그 안에 물이 가득하니 ‘백록담’이다. 한라산 서쪽 기슭 대정현 경계에 이르면 깎은 듯 서 있는 벼랑 앞에 겹겹이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는데, “산꼭대기가 웅장하기는 장군이 칼을 찬 것 같고, 아리땁기는 미녀가 쪽을 진 것 같으며, 스님이 절을 하고 신선이 춤을 추며 호랑이가 웅크리고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상으로 비유되는 ‘영곡(瀛谷)’이다. ‘오백장군동’이라 하고, ‘천불동’이라고도 하며, 일명 ‘행도동’이라고 불린 곳이다. 책에는 현존하는 3가지 제주십경인 국립민속박물관의 ‘탐라십경도’와 ‘제주십경도’, 일본 고려미술관의 ‘영주십경도’가 화제(畵題) 원문 풀이와 함께 섬세하게 실렸다. 저자는 “제주는 유배를 받거나 목사(지금의 도지사)로 명 받지 않고서는 외지인 갈 수 없던 곳이어서 ‘제주십경’이 고유한 독자성과 순수하고 몽환적인 ‘향촌 화풍’을 간직하게 됐다”며 “예술가치는 물론이고 지역 양식, 주변 양식을 가장 충실하게 실현한다는 점에서도 제주그림은 한국미술사에서 주목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18세기 '해동지도'에 수록된 '제주삼현 오름도'에서 제주는 활짝 핀 연꽃처럼 표현돼 있다. /사진제공=혜화1117


옛 그림을 오늘의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 저자는 “신성함은 사람에게 있지 않다. 자연 속에서 숨 쉬는 법이다”고 운을 떼며 “강정 구럼비는 해군기지 건립으로 훼손됐고 비자림 숲은 도로를 넓힌다는 이유로 베어졌다. 지금도 엄청난 파괴를 겪고 있는 제주의 고운 자연을 지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시대의 불편함 속에서 책은 독자들에게 선물처럼 다가온다. “방 안에 앉아서, 오히려 실재하지 않는 이미 사라져버린 옛 제주의 풍경과 마음껏 조우할 수 있으니 눈 밝은 독자라면 굳이 제주에 가지 않아도 그에 못지않은 즐거움을 이 책을 통해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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